7센티 외출
#1
청춘과 함께 8센티 굽도 포기하였었다.
언젠가부터 나의 최대치는 6센티가 되었다.
그것도 굵고 뭉툭한 굽이 대부분이다.
날렵한 하이힐을 버리도록 내가 나를 설득할 포인트는 많았다.
가령, 손가락 한 마디쯤 높여 봐야 너를 아무도 크게 봐 주지 않는다, 키 큰 여자가 아니라 하이힐 신은 작은 여자일 뿐이다, 다리와 무릎이 원하는 쪽으로 하여라, 높은 구두와 어울리는 옷이 이젠 없다, 그러다 넘어지면 꼼짝없이 방구석에서 숨을 거둘걸?
나는 하이힐을 버려야 하는 수십 가지 이유를 대면서 위안으로 삼았다.
그래도 내 허영심은 조촐하게 살아서 가끔 6센티가 섭섭하기도 하다.
몇 번 신지도 못했던 7센티 부츠를 꺼낸다.
플랫폼 창이 1센티니까 체감 높이는 6센티로 느껴질 거야.
속에 박아 두었던 신문지를 펼치고 먼지를 닦고 발을 디민다.
발을 두어 번 탕탕 굴러 본다.
괜찮구나, 이만하면.
7센티 부츠를 신고 나는 줄리엣 비노쉬의 <엘르>를 보러 갔다.
순전히 그녀를 보러 갔다.
소극장에 관객은 나까지 3명이었다.
제각각 온 관객은 삼각형으로 흩어져 지루한 영화를 보았다.
줄리엣 비노쉬(안느)가 성매매 여대생과 인터뷰할 때나, 성매매 장면들에서 졸리려고 했다.
감독의 의도가 눈요깃감 영화가 아니라면 경우의 수를 일일이 열거하는 친절은 필요없는데, 조금 따분하였다. 충격적이거나 신선한 주제는 이미 아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제오늘 일도 아니며 이슈조차 아니게 되었다.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성매매로 학업을 이어가는 일이 어찌 대수롭지 않은 일인가.
더구나 여대생들은, 성매매 그 자체보다 더 싫은 것은 싸구려 아파트의 가난의 냄새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런 사회적 고발만이 주 토픽이 아니다.
성공한 중년 여성의 무미건조한 결혼생활, 되찾고 싶은 사랑에 대한 감각, 회복에의 갈증, 정형화된 사회생활과 가족관계에 대한 분노, 남자들의 이기심, 그런 것이다.
우리 지구별 어디에나 쌔고 쌘.
줄리엣 비노쉬(안느)도 하나 다를 것 없었다.
그녀는 다만, 어느 날 성매매 여대생들과의 인터뷰에서 돌직구를 얻어맞아 신경세포가 깨어난 것이다.
여대생들을 만나며 그녀는 춤추고 술잔을 높히 든다.
갇힌 틀 속의 자신을 잠시나마 풀어놓는다.
그녀들은 결국 갖지 못한 서로의 것을 추구하는 셈이다.
젊은 여자애들은 안정된 경제를, 중년의 여자는 솔직한 사랑을.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갈망할 뿐 결코 자신의 삶을 떠나가지 않을 것이다.
성매매로 학업을 이어가는 두 여대생이 어둡기는커녕 맑고 순진하게 보였다.
내 눈에만 그런가?
평범하고 수수한 그녀들.
음모까지 노출되는 장면에서도 끈적임은 보이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몸뚱이마저도, 그래서 담백한 연출이 되었다.
프랑스답다는 생각에 웃었다.
잠시, 젊음을 그렇게 지나가는 그 아이들이 애처로웠다.
줄리엣 비노쉬.
그래 참, 나는 그녀를 보러 왔었지.
청순하고도 관능적이었던 그녀.
<데미지> 이후 그녀의 영화를 보질 못한 것 같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늙어 있었다.
여배우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작고 짧고 뒤집어진 손톱을 가졌다.
적당히 몸도 불어나 있었다.
세계적인 여배우에게나 촌구석 여자에게나 세월이 똑같이 적용된 사실에 나는 안도하였다.
그러자, 젊은 시절 그대로에서 주름지고 늙어 가는 그녀가 감동스러웠다.
변하지 않은 것은, 하하, 저 어수선한 헤어 스타일, 일주일 감지 않은 듯 떡진 검은 머리.
#2
섹스를 끝낸 남자가 나체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나체의 여대생이 같이 소리쳐 불렀다.
저 노래가 뭐였더라.
가사까지 또렷한데, 저 노래 제목이 뭐였더라.
가을의 주제곡처럼 회자되어 식상하기까지 한 노래 말이다.
줄리엣 비노쉬(안느)의 초대 테이블에서 상상으로 합창한 저 노래가 뭐였더라.
이상하게도 혼자 시작하여 합창으로 끝나곤 하는 저 노래.
그리고 영화 내내 깔리는 이 클래식 곡은 또 뭐더라?
겨우겨우 7센티를 신은 나는 갑갑하였다.
영화 속의 줄리엣 비노쉬는 8센티 이상 가는 하이힐을 잘도 신고 있건만.
아, 맞다, 고엽.
저녁 싱크대 앞에서 그 지겨운 노래의 제목이 떠올랐다.
잠시 후 다시 잊고 아 뭐였지? 고백? 고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