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각자의 숙제

愛야 2017. 3. 7. 02:28

 

#1.

냉장고를 열자 달착지근한 향이 난다.

김치향이 아니라 무려 딸기향이다.

어제 딸기 1kg 1박스를 샀더니 냉장고를 열 때마다 딸기의 존재를 깨닫는다.

내일 아침 샐러드에 듬뿍 얹어 먹을 생각에 미리 흐뭇하다.

기쁨이 점점 단순하고 쪼잔한 것에서 오고 있다.

 

#2

낮에는 <문라이트(Moonlight)>를 보았다.

영화관 안으로 총 4명이 들어갔다.

모두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다.

웃기게도 이 영화관에서는 흔한 모습이며, 아무도 쑥스러워하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자 나는 후회가 조금 되었다.

이유는 촬영기법 때문이었다.

카메라가 인물 주변을 빙빙 돌고, 인물과 같이 걷거나 움직였다.

흔들며 찍는 핸드 헬드(Hand Held), 가장 싫어하는 화면 스타일이다.

영상적 효과를 논하기 앞서 나는 멀미가 난다.

내용이 아무리 중요해도 고개를 숙이고 장면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곤 했다.

다행히 초반에 그랬으나 자주 등장하진 않아서 끝까지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상처받으며 자라는 일은 너무나 가슴 아프다.

웅크린 아이의 눈은 작은 짐승의 그것과 같다.

두려움과 애원과 기죽은 자신의 운명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 흑인 왕따 소년이 어른으로 자라며 혼란스러웠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이다.

음악이 좋았다.

명대사도 나온다.

"달빛 아래에서는 흑인 아이들도 푸르게 보인단다"( In the moonlight Black Boys look like Blue. ) 

이 한 문장이 모든 것을 함축하지 않을까.

유색인종, 성 소수자, 그 모든 인간이 달빛의 품에선 단지 같은 인간일 뿐.

문제는 달빛이 세상에 늘 머무는 건 아니니, 핍박과 폭력을 피하기 어렵다. 

삶이란 세상, 그 한가운데서 각자 외롭게 살아내는 것이다. 

 

(영화 카테고리에서 포스팅하려다 정신력에 급노화가 와서 변죽만 울리고 이만 총총.)

 

#3

영화관 밖은 아직 한낮이었다.

볕은 차갑지 않으나 봄답게 바람이 불었다.

문화회관 뒤편의 언덕길을 올라갔다.

하, 20년을 이 동네 살면서 이 길을 가 본 적이 없었다.

아무 용무도 없이 어슬렁거리며 언덕을 한 바퀴 돌아 내려왔다.

언 땅을 뚫은 새순들이 이미 지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