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오전.
피곤한 주말을 지낸 탓인지 잠이 늦게 들었던 탓인지 몸이 천근 같고 얼굴이 퉁퉁 부었다. 늦잠을 잔 아들이 아침도 안 먹고 학교로 간 후 커피를 머그로 한 잔 가득, 비스켓 5개를 가져다 테이블에 놓았다. 나는 아이를 잘 안 깨워 준다. 늦어서 지각해도 할 수 없다. 오늘은 8시가 되었는데도 일어나질 않았다. 계속 두어버릴까 했지만 새 학기, 새 담임을 무시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방문을 열고 소릴 질렀다. 학교가 다섯 번만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니 망정이다. 휴대폰 알람으로 곧잘 일어나곤 하더니 요즘엔 늦잠이 잦다. 내일도 늦잠을 잔다면 아들은 아마 지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치과의 예약은 11시에 되어 있었다. 10시엔 집을 나서야 되는데 몸이 안 따라 준다. 결국 택시를 타고도 10분 늦게 대학병원 치과에 당도했다. 두 번째 신경치료를 했다. 어금니 뿌리 안쪽의 신경은 깊어서 마취가 안 된다며 그냥 치료를 받았다. 아픈 건 미련하게 잘 참는데, 신경을 건드리며 시린 듯한 통증은 질겁을 하겠다. 양손을 꼭 쥐고 힘을 주며 참다가도 신경이 건들리면 으악 소리가 절로 났다. 진땀이 축축하게 이마에 배였다. 차라리 빼 버리고 싶은데 의사들 입장은 그게 아닌 모양이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의사들은 사람도 아니다...축 사망하는 줄 알았지만 구사일생 살아서 치료대를 내려왔다. 얼굴이 다 퀭했다. 다음 날짜를 예약한 후 담당의사에게 긴히 중요한 질문을 했다.
"술 마시면 절대 안 되겠지요?"
"아, 내일부턴 큰 문제는 없습니다." 야호!...
"단 치료기간이 좀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냥 야호!!
월요일 오후
지하철을 갈아타며 늦은 출근을 한다. 롯데백화점 지하상가를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사람들이 다 쏟아져 나왔는지 발 옮기기도 번거롭다. 그 복잡하기 짝이 없는 길의 한복판이 둥글게 비어 있다. 나는 한산한 그 곳으로 당연히 걸음을 옮긴다. 아니었다. 빈 공간이 아니었다. 한 젊은 스님이 차가운 돌바닥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이 앞에는 모금함이 놓여 있다. 바닥에 앉아 있으니 먼 곳에서 보았을 때 그 윗부분 공간이 비어 보였나 보다.
세상을 살아오다 보니 모습에서 그 사람이 대강 읽혀지곤 하였다. 중의 흉내를 내는 거리의 사이비들은 그 낯빛부터가 달랐다. 세상 온갖 사건사고를 겪었음을 거친 얼굴이 말해 줬다. 그들이 내미는 손끝에서 고무신 신은 발끝까지 부처님은 보이지도 않건만 그런 자들이 불경은 더 잘 외웠다. 짐작컨대 불전함에 들어온 그날의 수입금을 털어 저녁엔 소주잔을 기울이거나 여자를 품에 안기 위해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호기롭게 떠날 것이다.
스님 2미터 앞에서 갑자기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하여 스쳐 지나가는 짧은 사이, 나는 젊은 승려를 내려다 보았다. 가장 그 가까이 지나가고 있는 사람은, 멋모르고 승려의 반경으로 진입한 나밖에 없었다. 회색 털모자를 쓰고 야위지만 맑은 얼굴로 아무 소리도 없이 한 권의 불경을 보고 있었다. 왜 여느 중들이 그러는 것처럼 사람들의 시선집중과 중임을 증명하기 위한 독경을 하지 않을까. 그는 조용히 한자가 가득 적힌 알 수 없는 책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승려의 앞에 인쇄된 유인물이 쌓여있는 것을 본 것은 막 그를 다 지나가려 할 때였다.
민들레 밥집의 자원봉사자, 후원인들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앞에 놓인 모금함에도 "민들레 밥집 후원함" 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흘깃 보았었다. 결코 흘깃 보아서는 안 되는 내용을 그저 흘깃 보았었다. 젊은 승려는 절을 짓는 대불사 자금을 모금하지도, 달마도를 팔지도 않고 민들레 밥집을 위해 앉아 있었다. 차가운 돌바닥에서.
망설임의 찰라는 항상 후회를 남긴다. 바쁜 시간을 빙자하며 나는 가방을 열고 지갑을 꺼내는 수고를 하지 못했다. 유인물을 한 장 집어들지도 않았다. 총총히 다른 행인들과 보조를 맞추며 젊은 승려를 지나쳐 왔을 뿐이다. 몇 초간 그를 내려다 보며 생각을 한 사람이든 멀찍이서 돌아간 사람이든 뭐가 다른가. 깨우침이란 행동이 수반되지 않으면 언제나 현재 진행형인 법이다.
월요일 저녁
종일 식사다운 식사를 못 했다는 걸 집에 와서야 깨닫는다. 배는 고프다 고프다 이젠 안 고프다.
오늘은 이상하게 하루종일 커피가 고프다. 맑고 연한 커피를 한 잔 들고 음악을 크게 튼다. 마음이 아래로 한참 내려가 있다. 우울의 원인을 잘 알므로 괴롭다. 나를 조종한 것은 나이기에 더더욱 나를 용서 못하겠는 마음이다. 주말 창원행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ㅡ는 후회는 이미 늦었다.
젠장...대체 어쩌자고, 무얼 위해 사는거야. 죽어지지 않으니 그냥 사는거야?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을 모독하는 이 따위 발언은 왜 꼭 하지 말아야 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아니면 이 시간에 무슨 생각을 해야 해? 고등어를 구울까 고민하면 되는거야?
오후의 젊은 승려는 이제 모금함을 안고 떠났을 시간이다. 내가 최근 고통스러워 하며 삼켰던 밥을 잠시 떠올렸다. 내가 밀쳤던 밥을 노숙자들에게 주기 위해 무연히 앉아 수많은 발들을 보았을 그. 멈추어 주지 않고 비껴가기만 하는 수많은 발들을 보았을 그. 많은 발들은 최대 규모의 백화점을 향하고 있거나 다녀오는 중일 확률이 크며 그럴수록 멈추지 않을 확률도 크다.....다음 번 그를 만나면 망설임 없이 발을 멈추리라. 나의 위선적인 돈일지라도 모금함을 무색치 않게 하리라. 유인물도 한 장 집어들고 골똘히 보아 주리라. 그러면 혹 부처님이 이 오랜 죄책감을 감해 주실까?
내 속에는 잘 훈련된 사기꾼이 들어 있다. 나에게만 들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