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주변학파
어제는 일기예보만큼 꽃샘추위가 심하진 않았다. 날씨는 맑았고 바람도 적당했다. 오후에 약속시간과 한 시간 정도 공백이 생겨서 집 근처 공원에 갔다. 햇살을 쬐며 벤치에 앉아 있고 싶었다.
조각공원이란 이름에 걸맞게 잔디밭 곳곳에 조각품들이 서 있었다. 설치된 지 오래되어 감각적인 면은 떨어졌다.
작품들을 건성 보며 걸어나가니 우와, 또 다른 공원이 이어져 있었다! 넓고 여유로운 산책로에 음악이 흐르고 분수가 음악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솟아올랐다. 가까운 곳에 이리 널널한 공원을 두고도 몰랐다니 청맹과니가 따로 없었다. 느리게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앉아 있고 싶은 벤취마다 할일 없는 할배들이 우 모여 장기를 두고 있었다.
공원에 이어진 울타리 너머는 UN평화공원이다. 이 공원은 전세계 유일한 장소로서 UN 참전용사들의 묘역을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다. 참전하였던 외국 국가원수들이 부산에 오면 참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독특한 공원 가까이 살면서 한번도 안 갔으니 무심하다고나 할까. 내가 넘어갈까 봐 저런 경고문을 붙여 놓았다.
울타리 너머 습지 같은 연못에서 오리가 푸드득 꽥꽥거리고 있었다. 마음에 갑자기 들었다. 사람들 손을 많이 타지 않은 자연의 공원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에 꼭 들러야지 점을 찍곤 관리인에게 입장시간과 휴일 등을 물었다. 연중 무휴. 오후 4시 30분까지 입장. 입장료 없음.(젤 맘에 드는 부분임)
공원과 맞붙어 박물관이 있다. 즉 조각공원, UN 평화공원, 박물관이 사이좋게 이웃하고 있는 셈이다. 박물관 뜰로 들어가자 웨딩 촬영하는 신랑신부가 보였다. 우리 시절엔 야외촬영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결혼식 전에 미리 드레스 입고 여기저기 다니며 야외촬영이나 앨범촬영을 해 버리면 참 김샐 거 같다. 결혼식장에서 신부의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짜잔 처음 보아야 황홀할 거 아닌가.
박물관에서는 헤르만 헷세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배우 같이 분위기 있는 얼굴이 바람에 펄럭였다. 시간을 보았다. 이미 오후 5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헷세의 무엇을 박물관에서 전시하는지 모르겠지만, 알려고 해도 관람할 여유가 없었다.
헷세가 쓰던 안경이나 펜, 책꽂이, 슬리퍼 등을 전시하고 있을까? 다만 그것을? 물론 헷세가 말년에는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 그림 전시가 많을 것이다. 혹시 그의 작품 세계를 날아다녔던 저 철학과 고뇌와 실존도 전시되고 있을까? 입장 관람은 역시 다음 기회에....
내가 사진을 찍고 있는 등뒤로 신랑신부 일행이 지나갔다. 신랑이 말했다. 아, 헤르만 헤세 뭐하는 사람이더라? 들어 봤는데... 나는 뒤돌아 보았다. 그려, 헷세를 몰라도 만수무강에 아무 지장 없다, 이넘아. 신부가 치켜올린 드레스 자락 아래로 속에 입은 청바지가 보였다, 증말 깬다.....
대학 다닐 때 우린 스스로를 "도주파"로 칭하곤 히히덕거렸었다. 36계파가 아니라, 도서관 주변학파를 줄인 말이었다. 즉 도서관 주변에서 얼쩡대며 논다는 심오한 뜻이었다. 나는 박물관에 입장은 하지 않고 박물관 주변만을 한 바퀴 빙 돌았다. 박물관에 들어가 오래된 물건에 코를 박으며 정신적 소양을 쌓은 것보다 이 소풍이 더 유쾌하다. 어쩐지 앞으로 나는 박물관 주변학파가 될 것을 예감하는 것이다. 박주파? 음...어감은 좀 껄적지근하다.
박물관 옆뜰에는 꽃들이 소담스레 푸른 하늘 아래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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