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배추벌레 효과

愛야 2007. 8. 11. 09:54

아주 오랜만의 모임이었다.

수 년 전 아이가 다녔던 논리속독 학원에서 만났던 엄마들과 띄엄띄엄 이어오는 모임이다.

다들 바빠서 근 8개월 만에 만나는 터라 반가운 마음이었다.

 

그리하야 낮 12시, 나이도 제각각인 4명의 아지매들이 모였다.

빠진 한 명은 그 학원 원장인데 이번엔 우리가 일부러 연락을 안 했다.

암만해도 원장이 있는 자리에선 말을 가려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 좀 불편했다는 말이다.

막국수와 보쌈을 시켰다.

원장이 고기를 못 먹기 때문에 그 동안 고기집에서 모임을 못 가졌던 한풀이 차원이었다.

 

실내가 깔끔하고, 뭔지 모를 글귀가 일필휘지 날아간 세라믹 액자도 보였다.

배 고픈 아줌마들 앞에 전초전으로 싱싱한 양상치 샐러드와 감자 샐러드가 나왔다.

양상치 한 이파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한 엄마가 소스와 잘 버무리느라 샐러드를 뒤적이다 말고 외쳤다.

옴마야, 이거 벌레 아이가!!!

 

오옷, 양상치 이파리 위에 작은 벌레의 자태, 연두색 배추벌레 새끼닷!

일제히 입 속에 든 것을 뱉거나, 물 마시거나, 우엑하거나 하였다.

눈 나쁜 나는 사물을 자세히 안 보기에 방금 삼킨 샐러드 잎을 기억할 길이 없었다.

모두들 말 그대로 벌레 씹은 얼굴이 되었다.

마침 곁을 지나는 직원을 불렀다.

 

이거 이거, 벌레가 있잖아요.(호들갑)

직원은 아, 하더니 얼른 접시를 가져갔다.

곧 책임자가 달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 하는 장면이 연출되지 않았다.

접시만 가져가고 조용한 것이다.

벌레에 충격을 입어 잠시 침묵하던 우리는 더 어이가 없어졌다.

곧 나는 우리의 실수를 알았다.

배추벌레의 사진도 한 방 안 박고 자진신고부터 하는 바람에 증거물 인멸이 돼 버린 것이었다.

내가 종업원을 조용히 불렀다.

아가씨, 방금 그 접시 도로 갖고 와요.

아니, 새 것을 가져다 드릴려구요.

새 것은 관두고 벌레 있던 거 갖다 줘요. 사진 찍을라고 그래요.

 

종업원이 주방으로 종종 가더니 이번엔 금새 사장이 달려왔다.

사진 찍으려고 한다는 말이 협박이 되었나? (난 블로그에 올리려고 한 말이었다, 맹세코! ㅎㅎ)

젊은 여사장이었다.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하더니 과연 예상대로 이렇게 말한다.

 

변명 같지만 유기농 야채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직접 장을 봅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머시여라? 벌레가 유기농의 증거는 될지 몰라도 손님상에 올라야 하는 이유는 아니지요. 샐러드에 배추벌거지가 고대로 있었다는 것은 잘 안 씻었다는 말밖에 더 되요? 이것이 유기농이다 아니다 하고 뭔 상관인데요? 유기농은 벌레를 쌈 싸 먹는 겁니까? 덜 씻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말 할 필요가 없지요.

 

사장은 그냥 죄송하다고만 하면 되지 기타의 이유를 댈 필요는 없었는데 딴에는 손님을 안심시킨다고 유기농 어쩌구 생색을 내는 바람에 오히려 나의 심기를 건드린 꼴이었다.

일행들이 어, 식욕이 달아났다 어떻게 무서버서 먹지 하였다.

사장은 말귀를 바로 알아듣고 거푸 사과를 하며 주방에 주의를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니 우짜겠는가, 알았으면 되었음다 하였다.

 

 

잠시 후, 주문한 보쌈이 나왔다. 그래서 안 먹었냐고? 그럴 리가!

고기는 부드러웠고 곁들여진 무우말랭이도 오돌오돌 맛있었다.

정신 없이 먹다 보니 고기가 금새 바닥을 보인다.

일 인분 추가를 시킨다.

 

아까 입맛이 싹 달아났다고 한 아지매들 맞나?

찝찝해서 우찌 먹노, 기분 잡쳤다 이랬던 아지매들은 정작 음식이 오자 빛의 속도로 입맛을 회복했다.

무우쌈도 더 달라 하고 고추도 더 달라 한다.

우스운 것은 더 갖다 달라는 주문이 아주 당당한 목소리이며 종업원은 또 총알같이 달려온다는 것이다.

보통 한 번 정도는 더 주세요 하지만 두 번째는 눈치보는 분위기지 않은가.

작은 배추벌레의 힘.

시키지 않은 음료수까지 두 병 나왔다. 사장이 서비스하는 거란다.

뭐 음식값도 안 받겠다면 그 뜻을 갸륵히 받아들일 각오를 하였는데, 쩝 그건 아닌 모양이다.

 

다 먹고나니 수정과 가져다 드릴까요 한다.

오브 코오스지.

셀프 서비스인 커피도 아가씨가 쟁반에 받쳐 가져다 준다.

우리는 긴 수다를 당당히 떨었다.

배추벌레가 좀 작았는데 엄마 배추벌레가 나왔다면 음식값 굳을 뻔했다. 

소품용 배추벌레를 한 마리 델꼬 식당에 다니면....절대 아니 되겠다.

너무 잘 해 줄까 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