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래도 변치 않는 것

愛야 2007. 12. 29. 12:51

# 아침.

 

비가 온다. 소란하던 세상이 오랜만에 조용하고 차분하다. 차바퀴에 빗물이 짓눌리는 소리만 차락거린다. 방학이라 아이들도 다 집에서 늦잠에 빠져있을거다.

 

으악, 끄응, 에구구, 온갖 용쓰는 소리를 지르며 겨우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간다. 커피 물을 올려놓고 싱크대를 잡고 서서 설거지통을 멀거니 본다. 두 식구 입에 뭔 일거리는 끊임없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지난 월요일 허리를 어줍잖게 우지끈 했는데 근 일 주일이 지나도 낫지 않는다. 물론 더 나빠진 건 아니니 그냥 견디는 참이다. 오늘 아침에 마지막 남은 파스를 허리에 척 붙이고 생각하니 내가 참 많이 변하였다.

 

병 앞에선 겸손해야 한다. 잘난 척 말고 아프면 즉시 병원에 가서 의사의 말을 무조건 따르며 완치가 될 때까지 주구장창 다닌다ㅡ는 것이 예전의 내가 고수한 "병에 임하는 우리들의 자세"였다.

 

이는 병치레 많았던 아들을 키우며 철저히 실천되었을 뿐더러 내가 아플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약날이나 시간을 잊은 적 없고 늘 먹어야 하는 약도 똑 떨어지지 않게 신경쓴다. 그런 내가 이번엔 근 일 주일 병원도 안 가고 파스 붙이며 버티고 있다. 주변에서 병원 주사 맞으면 직방이라고 얼른 가라고 했다. 나는 응 알았어 하면서 안 갔다. 무슨 심산지 나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다 귀찮을 뿐이다.

 

며칠 약 먹고 주사 맞으면 되는 배탈이나 감기도 아니고 허리가 뚝 하고 분질러졌으니 정형외과에 가야 한다. 정형외과 치료라는 게 참 그렇다. 다친 것이 아닌 정형외과 관련 병이라는 게 주사 맞고 물리치료 받으면 좀 낫고 다시 살살 아프고를 반복한다. 결혼 전 6개월가량 허리 치료 받느라 엉덩이 굳은 살이 박힌 적이 있었는데 결국은 시간이 낫게 했었다. 오른 검지 마디나 무릎이 시큰거려도 아직 한 번도 안 간 이유는 그 길고 긴 "치료의 길"로 들어서기가 싫기 때문이다

 

성격상 의사가 그만 오라고 할 때까지 다닐 것이 뻔한데 그 첫걸음을 디디기가 이젠 참 싫다. 미련 부린다고 될 문제가 아님도 알지만 싫은 것을 우짜나? 어제 잠들 때는 그만 자복하는 심정으로 병원 가야겠다 마음 먹었는데 마침 아침까지 비가 오고 있잖나. 오늘 집에서 나가지 마라는 하느님의 계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프면 아픈대로 안 아프면 안 아픈대로 그냥 살고 싶다. 안 아프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는 것 자체가 번거롭다. 아프면서 병원 안 가는 사람을 보면 울화통이 터져 막 뭐라고 나무라기도 했던 나를 한없이 반성한다. 병원 대신 목욕 바구니 들고 새색시 걸음으로 집앞 목욕탕이나 갈 것이다.

 

# 밤

우리집 유일한 꽃화분은 언젠가 올린 연산홍이다. 한 화분에 세 색깔 꽃을 피워 나를 한철 웃게 하였다. 어제밤 베란다에 놓인 화분 위에 무언가 하얀 것이 떨어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휴지 조각이 날렸나 싶어 아픈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일직선으로 조심조심 앉았다.

 

나는 옴마야! 소리를 질렀다. 휴지가 아니라 하얀 꽃이 한 송이 피었던 것이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언제 꽃을 품었는지...이 엄동설한에 뭐하러 꽃봉오리를 맺고 꽃잎을 열었을까. 옆에는 다른 봉오리가 볼록하니 준비 중이었다. 아들아 이것 좀 봐라. 왜, 벌레 나왔나. 벌레가 아이고 꽃이 피었다, 따뜻해서 봄인 줄 알았나벼.

 

          

 

 

내가 아무 생각없이 드러누워 있는 중에도 세상은 잘 돌아가서 저넘의 연산홍은 꽃을 피운다. 꽃잎은 나오자마자 얼었는지 시들고 있다. 나는 가위를 들고 와서 무성히 웃자란 가지를 다듬어 정리해 주었다. 아직 지난 해 누런 잎도 매달려 있는데 그 사이 초록잎이 돋아 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천천히 가라, 생각할 틈을 좀 다오. 가끔은 누리고 싶은 계절도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