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현관을 들어오는 기척이 등 뒤에서 났다. 컴퓨터 삼매경에 빠져 있던 나는 빙그르 의자를 돌려 녀석을 맞았다. 녀석은 보충수업을 하고 학원에 들렀다 오는 길이다.
"어서 와라. 애썼다."
"어, 엄마...으하하하하."
녀석이 나를 보더니 마구 웃었다. 언제부터 엄마를 저리 노골적으로 좋아했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웃는 아들의 시선이 내 머리에 계속 꽂혀 있는 것이었다.
"엄마, 머리가 그기 뭐꼬!"
"아 뭐 말인데!"
하다가 그제야 퍼뜩 생각이 났다. 나는 낮에 머리카락을 잘랐던 것이다. 내 머리통을 내가 볼 수 없으니 까맣게 잊었는데 집으로 들어선 아들은 나를 보자마자 기가 막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하도 길고 어수선해서 좀 잘랐다, 뭐 이상하나?"
"그래도 그건 아니잖아, 80년대 머리 같다."
"이거 바가지 머리 아이가, 요새 유행하는 건데."
"엄마한테 어울린다 생각하나? 지난 번 단발머리가 차라리 낫다."
"야, 이런 짧은 것이 자라서 그리 된 거다, 첨이라 그렇지 며칠 지나면 개안타."
"똥글똥글하이 웃기거마는, 앞머리는 쥐 파먹은 거 맨치로. 으헤헤헤."
"좀 덜 된 바가지 같긴 하지? 담 번엔 스타일이 완성을 이룰 거다야."
"그기 무신 최신 머리고, 우긴다고 우겨지나."
나이들면 이쁘다는 말보다 어려보인다는 말이 최고라는 우스개가 실감되는 요즘이다. 헤어스타일이랄 것도 없이 대충 하고 다니는 나도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는 모양새를 선호하니 말이다. 겨울바람에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척척 들러붙고 곤두서길래 마침 길기도 많이 길어서 확 잘라버렸던 것이다. 두꺼운 겨울 옷깃에 눌리지도 않고 뒷목이 가뿐해서 좋았지만 아들은 나의 얼굴과 머리 스타일이 따로 논다고 호탕하게 비웃었다.
저것이 일 주일 전 이야기다. 사실은 신년축하 빠마를 염두에 두었는데 염색으로 손상된 머리카락이 걱정되어 커트로 만족했다. 목덜미 시원히 커트한 후 계속 날씨가 따뜻했다. 윗지방엔 눈이 오네 한파가 오네 했지만 착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남쪽나라는 여전히 눈 사고도 안 나고 빙판에 넘어질 일도 없었다.
그러다가 어제부터 그만 남쪽지방에도 엄청난 추위가 왔던 것이다. 며칠 일기예보에 속던 차라 더이상 안 속으려고 하필 가볍게 옷을 입었었다. 핀트를 딱딱 못 맞춘 나는 퇴근 무렵 얼어죽을 뻔했다. 시퍼런 시체 얼굴로 버스 정류소에 서 있으려니 자라처럼 목이 자꾸 짜브라졌다. 자동으로 어깨가 거의 귀에 닿게 올라 붙었다. 궁상스런 포즈의 전형이다.
머리카락이 두툼히 뒷목을 감싸고 있었더라면 적어도 이런 비굴한 자태는 아니었을 텐데. 잘라버린 머리카락이 이때처럼 아쉬워 본 적이 없었다. 겨울엔 머리 길고 짧고가 얼마나 크게 와 닿는지 모른다. 으...아까운 머리카락이여. 일 주일만 참을걸. 염색으로 살짝 부서지긴 했지만 그래도 순모 아닌가, 천연 순모 목도리. 신년 축하를 음력으로 할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