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

봄밤

愛야 2008. 3. 23. 18:52

학부모 간담회는 작년과 달리 저녁 7시였다. 일하는 부모들을 위한 배려다. 굳이 서두르지 않았던 덕에 30분쯤 늦게 간다. 교장의 인사말과 학교소개는 건너뛰고 싶었다. 자화자찬을 듣는 일은 작년으로 충분하다. 늦게 들어간 강당은 의외로 썰렁하고 참석율은 저조하다. 유인물을 받아들고 뒷자리에 앉아 학년부장 선생님의 설명을 듣는다. 다 듣고보니 여긴 3학년 학부모 장소다. 학부모 간담회가 강당에서 있다고만 아는 나같은 지각생은 학년별로 흩어모인 줄 어찌 아나. 하지만 3학년 간담회를 들은 것이 오히려 정보차원에서 다행이었다.

 

2학년 모임을 찾으러 내려 간다. 아래층에 한 무리의 학부모가 모여있다. 1학년 학부모 모임이다. 몇 번을 헤매이다 겨우 찾은 2학년 학부모들은 벌써 각 반별로 교실에 모여 담임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아들은 나에게 담임 선생님이 우리반은 반별 모임 없으니 전체 학부모 간담회 끝나면 그냥 가시라 했다고 전했다. 나는 그 말을 고지식하게 믿었다. 그래서 아들 교실에 불이 켜져 있고 학부모와 담임의 모습을 보자 의아했다. 그냥 가라고 했다던데 왜 교실에 모여있나. 나는 이렇게 띨하다. 짧게 실소하며 소음과 함께 조심스레 들어간다.

 

담임이 오랜 말 끝에 우리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는지 물었다. 한 엄마가 손을 들며 누구 엄마인지 말씀드리지 않을게요 하였다. 모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 선입견을 가지고 싶지 않으니 누구의 부모라고 밝히진 말기로 합시다라고 담임이 말했음이 분명하다. 그 엄마는 야간자율학습 불참할 경우에 대해 의견을 말했다. 담임은 담임과 조율하는 방법을 제시하였고 모두 수긍했다. 그는 학교의 여러 답습되는 폐단을 고쳐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노라고 했다. 담임은 전교조 선생님인지 모른다. 그는 솔직하게 말해서 보충수업은...하고 말했다. 솔직까지 안 들먹여도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대놓고 학부모에게 말하는 건 소신이 있다는 것이다. 교무실에서 말싸움깨나 하시겠다. 또 다른 분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내가 손든다.  

 

보충수업을 할 수밖에 없다면 기왕 하는 거 수업을 알차게 해주십사고 했다. 수업종 한참 지나서 들어오시거나 어영부영 수업시간 보내거나 지정된 문제지 한 권 떼는 것보다는 좀더 책임있는 보충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선생님께서 아까 솔직히 저희들에게 보충수업에 대해 언급해 주셨기에 저도 이런 건의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좀 더 나은 학교로 발전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담임은 얼굴이 벌개지노라고 말했다. 그래야 한다. 보충수업비 거두는 일에 정확한 만큼 그 유급수업의 질에 대해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반성할 점은 수두룩하다.

 

나는 정직하게 말해버렸기 때문에 다소 신랄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괜찮다. 언제부터인가 불이익을 우려해서 참는 짓이 싫어졌다. 내 아들에게 담임이 안 좋은 감정을 품으면 어쩌나, 그래서 학부모의 관점을 내색하지 않고 지나가자, 좋은 게 좋은 거다, 이러기 싫어졌다. 학교 밖에서 지켜보는 눈도 사실은 섬세하고 때론 매섭다는 것을 알려야 자성도 할 것이다. 세상이 바뀌었고 바뀌어야 할 부분들은 아직 너무나 많다.

 

담임은 다행히 학부모 간담회에서 한 학부모의 '하실 말씀'을 걸고넘어질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모임을 마치고 나오며 늦게 들어와서 죄송했다고 했다. 그리고 담임에게 누구의 엄마라고 밝혔다. 이젠 허니가 찍혀도 어쩔 수 없다. 밝히지 말걸 하는 후회는 없었다. 아이를 맡긴 학부모가 이리 대범해도 되나 모르겠다. 학교 운동장으로 나오자 학교 동네 산등성이에 불빛들이 빼곡했다. 하나하나 다 집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바닷가 근처 동네에선 볼 수 없는 산등성이 불빛들이 아름답다. 아름답기를 빈다.

  

          

                                                   

                                                          카메라 흔들려 불빛이 눈꽃 같지요.

 

일요일 아침 학원가는 아들에게 요플레와 샌드위치를 준다.

"엄마, 오늘 23일인데?"

"그래서 뭐?"

"요플레 날짜가 지났다, 21일이 기한이잖아."

"응, 어차피 요쿠르트는 썩힌 거다. 발효."

"헉."

"하루쯤 지난 거(오늘은 이제 시작이니까) 먹었다고 죽겠나? 개봉 안 한 채로 냉장고에 있었는데 괜찮다."

아들은 마지못해 요플레를 먹었다. 하지만 만약을 위해 하나 남은 것을 가져와 내가 먹었다. 임상실험의 차원이다.

 

점점 나는 그래도 돼!가 늘어간다. 허용의 의미가 아니다. 표현하지 않았던 까칠함을 이젠 내보이겠다는 쪽에 가깝다. 불이익과 손상을 두려워해야 하는 그 무엇을 나는 더이상 가지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내가 견뎌야 할 것은 언제나 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