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도전기

愛야 2008. 4. 4. 19:51

 

친정에 갔던 지난 겨울 어느 날, 엄마 침대 발치에 비스듬히 누워 물었다.

"엄마, 단술 맹그는 법 갈켜 줘."

"내가 못 움직이는데 우찌...."

"말로 갈켜줘 봐."

"응...이리저리 삭혀라."

"알았엉."

 

한 달 뒤, 같은 자세로 다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단술 맹그는 법 다시 갈켜 줘. 까먹었어."

"응...이리저리 삭혀라."

"인자 학실히 알겄어."

"자꾸 해 봐야 는다."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만들려고 마음먹었던 자체를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희미해져, 생생히 그려지던 마인드 맵도 퇴색되었다. 

 

기적처럼 엿기름 한 봉지를 사다 놓고 또 한 달이 지났다.

다시 물어보면 78세의 엄마에게 이번엔 얻어터질 것 같아 결국 어제 인터넷을 검색하였다.

사라지기 직전의 엄마 말씀이 인터넷에서 솔솔 피어났다.

 

그 나이 먹도록 단술(감주. 식혜. 경상도에선 주로 단술이라 합니데이) 하나를 못 만드나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초리라는 거, 다 안다.

결혼 전엔 당연히 차려주는 것만 먹었고 결혼 이후에는 나 말고 다른 식구가 안 좋아해서 못 만들었다.

주부들이 그렇듯이 나 혼자 먹자고 만들지 않는....아, 그려유. 사실은 저 못하는 거 너무 많아요.  

 

아들이 즐겼다면 진작 배웠을 터인데, 어릴 때부터 명절 큰댁에서 단술 주까 하면 늘 싫다고 했다.

그러던 녀석이 얼마 전 목욕을 다녀오면서 식혜 캔을 물고 오는 게 아닌가.

야, 너 식혜 안 먹쟎냐? 했더니 무슨 당찮은 말씀이냐는 듯이 아니 나 잘 먹는디요 한다.

한술 더 떠, 엄마 식혜 좀 사다 놓으세요라고까지 한다.

런 뒤통수형 배반을 봤나, 입맛을 바꿨으면 얼능 신고를 헐 일이지. 

 

콜라같은 정크 음료를 잘 사지 않기에 물 외의 음료는 쥬스였다.

메뉴를 바꾸어 주고 싶어도 대체품목이 없었다.

그런 차에 식혜를  좋아한다고라?

잘 되었다. 그리하여 내 아들의 할머니께 식혜의 방법을 물었던 것이다.

내가 단술을 만들겠다니까 엄마는 철들자 망령난다더니 니가 이제사 웬일이냐 싶으신 표정이었다.

 

아침에 시작해서 저녁에 드디어 완성되었다.

성공작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식혜 비스무리하게 되었다.

부엌에는 냄비, 곰솥, 국자 등이 몽땅 출동되어 뜻깊은 거사를 짐작케 했다.

이제 식혀서 냉장고에 넣으면 된다.

 

밥알을 손으로 문질러 보니 슬그머니 으깨져 형체도 없어진다.

5시간 밥통에서 숨죽여진 결과다.

삭히고 삭히니 탱글탱글이 사라진 자리에 맛있는 몰락이 들어찼다.

밥알 동동.

 

 잣이 없어 장식 못했지만 드세욤.

 

 

오늘의 산 교훈: ① 밥을 더 꼬들꼬들 지어야겠다. 5시간 삭히니 곤죽이 되어 볼품이 없다.

                      ② 많이 먹을 욕심을 버리자. 물 양을 너무 많이 잡아서 밥통에 붓고 남았다. 

                      ③ 아니면 큰 밥통을 새로 사자

 

속마음: 흰설탕 쏟아 부으며 야, 이건 허니만 멕이고 나는 쪼금만 묵으야 되겠다. 결코 건강음료가 아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