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혹은 기록

세피아색 시절

愛야 2008. 6. 1. 13:32

 
얼마 전 친정에 갔다가 옛 앨범을 뒤적였다.너무 낡아 한 장 한 장 분리되는 갈피를 추스리다가 사진을 몇 장 가져와 버렸다.언젠가는 각자 본인들 것을 챙겨가든지 아니면 형제 중 누군가가 새 앨범에 다시 정리해야 할 것들이다.가져올 수 없는 몇 장은 찍어왔다.굳이 세피아 효과 필요없이 이미 빛바랜 사진들.젊은 아버지, 지금 나보다 더 젊은 엄마.그들의 슬하에서 미래를 모르고 깡총거리던 나.

                                                                                       울아부지. 들국화 핀 들판에 문학청년 비스무리한 폼으로 뭔 상념하실꼬. 한 샤프 하셨고나,
                           

서있는 사람은 아버지 동생 숙부님. 두 분 용모나 성격이 안 닮으셨다.숙부는 할아버지 모습을, 우라부지는 할머니를 닮았다.성격은 또 반대로 닮으셨다.아부지 헤어스탈이 아주 현대적이다.역시 유행은 돌고 돈다.




 엄마....컬러사진인 거 보니 내가 찍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보니 엄마가 참 젊다.나는 엄마가 엄마였던 시절부터 기억하니 처녀적의 모습을 모른다. 이뻐서 논에 새참을 내가면 일하던 이웃 총각들이 다 쳐다봤다고 이모가 증언했다. 사진에는 엄마가 눈을 짜브라뜨렸는데 실제 엄마는 눈이 동그랗게 크다. 옛날엔 츠자 눈이 크면 흠이었다나?
병약하고 가늘어서 농사집에 시집 안 보내려고 외할아버지께서 고르다 보니 19살 노처녀가 되었단다. 선생질(!)한다는 웬 가난한 20살 청년을 중매로 맺어 결혼을 하였다. 엄마는 초례청에서 맞절을 하며 살째기 신랑이란 남자를 처음 보았단다. 햇볕에 타서 새빨갛고 빼빼한 남자가 있더란다. 겁은 하나도 안 나더란다. 엄마보다 먼저 시집 간 친구는 신랑이 억수로 겁나더라 했다는데. 그로부터 60년을 함께 사신다. 한 살 차이 신랑각시. 오죽 많이 싸우시며 지내온 세월일까.




이쁜 것 좋아하는 울아부지는 엄마를 좋아하셨을 거다. 뒤로 틀어올린 머리 스타일을 엄마에게 강요하다시피 하셨다. 우리도 기억난다. 당신은 잔 머리카락이 드러나는 목덜미가 이쁘니 올림머리만 해라. 긴 머리 고수하기 질린 엄마, 어느날 머리카락 삭둑 자르고 뽀그리 파마했다가 엄마의 신랑한테 쫓겨날 뻔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어쩌지 못해 사진처럼 숏커트 하시고 한복도 벗으셨다. ㅎㅎ




어린 나는 사진기만 들이대면 삐죽 어색한 폼을 잡았다. 엄마와 아부지가 짜고 내 신경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셨다. 저 화단에 사루비아가 피었는데 엄마가 여 봐라, 진딧물이 있제, 하며 가리켜서 그거 딜다본다고 내 똥꼬 보이는 줄도 모리고 궁딩이 치켜들고 있다.엄마의 걷어올린 한복자락과 올린 머리를 본다. 참 이뿌다. 어린 나는 파마했구나.
  

형제가 아니다. 남매다. 짧은 숏커트가 나다. 가발 수출로 국가경제가 살아나던 시절, 긴머리 아이들 유괴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울아부지 당장 막내 머리 잘라라고 난리쳐서 나는 흑흑 머스마처럼 숏커트해야 했다. 옆의 파르라니 깎은 중학생은 하나 뿐인 나으 옵빠다.
오빠는 어릴 때 날 많이 울렸다. 나는 툭하면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이 커서 단지 눈물이 숨겨지지 않았을 뿐인데 울보라고 놀렸다. 어느날, 둘이 함께 가서 과자 사라고 엄마가 돈을 오빠에게 줬다. 그런데 엄마 시야를 벗어난 대문부터 오빠는 냅다 혼자 뛰었다. 치사하게. 오빠야 같이 가자 애절히 부르며 뒤따라 뛰던 나는 그만 팍 엎어져서 무릎이 까졌다. 오빠는 바람처럼 가버렸고 나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오빠의 만행을 고발하였다. 저녁에 오빠는 뒤지게 혼났다. 오빠는 그 돈으로 만화방 간 것이 발각되어 더 혼났다. 실은 내가 고자질했었다. 복수차원에서. 우리는 꼭 갚는다.




아아, 그리고 요 녀석. 우리 어린 시절을 즐겁게 만들었던 강아지, 피스. 나는 피스보다 더 이쁜 개를 본 적이 없다. 피스는 거의 사람 수준으로 우리와 교감하였다. 피스를 잃은 지 35년이 더 지난 요즘도 우린 피스의 무용담을 얘기하며 웃었다. 어느 오후, 열린 대문을 향해 돌진한 후 종적이 묘연했던 녀석 때문에 언니는 눈이 붓도록 울다가 엄마에게 한소리 들었다. 쫑긋한 두 귀 좀 봐라. 쌍거풀 눈에 정말 털도 탐스러웠다...




6살 나. 엄마표 꽃무늬 원피스와 파마머리에 운동화, 배를 내밀고 섰다. 사진 찍기 어색 벌쭘한데 아부지가 자꾸 이리 서라 저리 봐라 해서 인상 잔뜩 구겨졌다. 엄마와 사루비아 딜다보는 위 사진이 그래서 연출된 것이다.어릴 때 코가 납작했구낭. 지금은? ㅎㅎ
사진을 보면 저 시간이 믿을 수 없어 눈물이 난다. 저 꼬맹이가 나였다는 증거가 도대체 어디 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