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언니가 있다.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고추장과 멸치통을 가져다 놓는다. 딱딱한 마른 멸치를 잘 안 먹는데 매운 고추장을 먹기 위해 가져다 놓았다. 식욕이 없어 그런지 자꾸 매콤한 게 먹고 싶다.
엄마가 편찮으신 후로 모든 장 종류는 사다 먹게 되었다. 엄마표 고추장은 특별한 맛이 있었다. 고운 빛깔에 적당히 찰지고 맵고 달콤한, 어디서도 엄마의 고추장처럼 맛있는 건 없었다. 자주 우리집에서 밥 먹고 뒹굴거렸던 내 친구들은 지금도 엄마의 고추장을 추억할 정도다. 하지만 봄날은 가기 마련이다.
엄마의 자리를 그럼 언니가 이어받아 줬느냐, 이게 영 아니올시다다. 우리 자매는 뜨게질, 바느질, 장 담그기 등 어느 하나 살림솜씨에선 엄마를 닮지 않았다. 흐흐 언니도 사다 먹었다.
몇 해 전 무슨 마음이 났는지 언니가 고추장을 담갔으니 가져다 먹어라 하였다. 오우, 맛은 둘째치고 무조건 콜! 고추장이 좀 비싸야 거절을 하지. 하지만 고추장 공급은 그것 한 번으로 끝, 언니도 식구가 적다 보니 담글 일이 없는 것이다.
우리집은 고추장 소비가 많다. 워낙 매운 것을 좋아할 뿐더러 어린 아들이 사흘이 멀다고 떡볶이 라볶이를 청한다. 고기도 빨갛고 맵게 볶아 줘 한다. 걸핏하면 비빕밥이다. 그때마다 고추장 퍼내는 손이 발발 떨린다. 작은 통을 사다 먹으니 사람이 쪼잔해질 수 밖에 없다.
하여서 얼마 전 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냐, 혹시 실수로 고추장 안 담갔나?" 나는 언니가 했을지도 모르는 실수를 나누어 지겠다고 갸륵한 뜻을 전했건만 이 할매는 눈 어두워 문자를 못 읽었는지 가물치 콧구멍이었다. 그래서 며칠 지나 통화할 때 문자 봤느냐 물었다. "봤다! 너 줄라고 고추장 6.5kg짜리 대따 큰 거 사서 트렁크에 싣고 댕기는 중이다 웬수야, 언제 올래?" 했다. 아니, 나는 고추장 혹시 담갔나 해서리 물어본 것 뿐인데... 싫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헤벌쭉 벌어지는 입 때문에 말이지. "멀 그리 큰 걸 샀냐? 고마버~~담주 갈게"
엄청 무거웠다. 그외 챙겨주는 것들, 이를테면 양념된 고기라든가 고등어 짜장면 등까지 몽땅 가져오려니 팔이 빠지는 줄 알았다. 언니는 내가 안 가져간다고 버틸까 봐 처음엔, "우기(조카) 차로 실어줄낑게 와서 가꼬 가라." 하더니 정작 가져오는 날엔 말이 바뀌었다. 뚱뚱한 지 아들 아끼려고 이렇게 말했다. "터미널에 내려서 너거집까지 택시 타고 가라. 우기차로 간다치면 기름값 그기 그기다." 이러면서 터미널까지만 데려다 주고 택시비 3만원을 준다. 이 무거운 짐에 돈까지 더 무겁게... 귀찮지만 언니의 뜻을 존중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았다. 그리고 나는 빠른 지하철 타고 집 근처까지 와서 택시를 이용했다. 택시비는 기본료 들었다. (이 사실을 언니가 본다면 나는 축 사망이다. 다 토해내라 할 것이 분명하다.... 언냐, 반어법이다. 그라고 벌써 똥 되었다. 설마 그걸 원하는 건 아니제?)
냉장고에 여러 통으로 나누어 넣어두니 맘이 뿌듯하다. 당분간 걱정 없다. 멸치를 고추장에 듬뿍 찍는다. 손 발발 안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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