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詩
이병률의 <인기척>
愛야
2007. 10. 23. 10:43
<인기척>
-이병률
한 오만 년쯤 걸어 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테냐.
후닥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
마알간 얼굴을 들이 밀면서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자고
슬쩍슬쩍 건드려 온다면 어쩔 테냐. 지친
오만 년 끝에 몸 풀어헤친 그 사람 인기척이
코앞인데, 살겠느냐. 말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