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걸어오던 할머니와 어린 손자가 무언가 서로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큰소리로 나무란다. 나는 깜짝 놀라 한번 더 쳐다 보았다. 혹시 할아버지였나? 아니, 할머니 맞네. 하지만 완전히 남자의, 그것도 걸걸한 축에 드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간혹 더이상 여성의 목소리가 아닌 여성을 본다. 나이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목소리도 물론 늙는다. 그러면 늙은 여자 목소리라야 하는데 늙는다고 여자가 남자로 변하다니. 국제시장에서 골라골라를 외치는 청바지 장수 아줌마의 목소리도 저리 굵고 갈라졌던데 그 사람은 너무 목을 혹사해서 그럴 것이었다. 성대에 이상이 온 장본인들은 더 싫겠지만 듣는 사람도 참 서글프다.
그런데 저녁 퀴즈프로에 나온 한 출연자의 목소리도 나를 혼동시켰다. 보던 책에서 눈을 흡떠ㅡ돋보기에서 눈을 들자니 그런 꼴이 되었다ㅡ화면을 보았다. 도무지 저 사람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겠다. 양복을 단정히 입고 대학에 출강도 한다는데 꼬라지는 남자면서 말의 품새와 어조는 참으로 여성적이지 않은가. 전공분야가 예술쪽이라 나이브해서 그런가? 말투는 곱지만 목소리가 가늘지 않아서 일단 남자라고 결론짓는다. 아니었나? 아담스 애플이 없었던 것도 같고...에잇 모르겠다, 경계선상의 인간들이여.
애매한 성별의 목소리를 들으면 항상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20년쯤 전이었다. 남편이 까페 공사를 맡았다. 발주자의 요청으로 답사겸 시장조사겸 한 bar에 가게 되었다. 아직 영업을 시작하기 전인 낮시간이었는데 간다고 연락을 해 두었는지 세 명의 아가씨들이 우리를 맞았다. 실내에는 우리만 덩그라니 있었다.
한 여자는 키가 컸다. 손발도 다 컸다. 마담이란다. 앗,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굵은 티를 감추려고 용을 쓴 목소리, 그녀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던 것이다. 드레스 위의 목울대며 절대 숨길 수 없는 실팍한 손....눈앞에서 게이를 목격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녀는 실연한 이야기를 하며 애절히 눈물을 보였는데 나는 민망해서 죽을 뻔했다.
마담이 무대로 나가 노래를 하는 사이 내 곁에 앉은 고운 여자가 나에게 과일을 집어주었다. 앞가르마 긴 생머리에 검정 슬리브리스 원피스를 입고 몸매가 가늘었다. 술을 전혀 못 마시는 남편과 발주자는 이것저것 둘러보며 의견을 나누고 종업원 문제까지 마담에게 조언을 구한 뒤 자리를 일어났다. 걸걸한 목소리의 마담은 온갖 교태를 굴곡지게 구사하며 배웅하였다. 내 곁의 여자도 나붓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역시 여자는 아담하고 나긋나긋해야 돼.
나는 밖으로 나와 신기해 죽겠다며 히히거렸다.
"우와, 그 마담 너무 표 나더라. 내 옆의 여자는 비위도 좋게 언니라 카데?"
"다 게이들인데 뭐."
"아이다, 내 여자는 진짜 여자다, 팔이며 목선 봐라, 곱다랗게 지방스럽지 않더나. 손은 절대 못속이는데 갸는 안 그렇던데?"
"어허이, 전부 다 게이들이라 카이...가서 물어 보까."
"허걱, 진짜가!! 내 옆의 여자도 머스마라 말이가!"
오오, 이럴 수가... 그 여성스럽기 짝이 없던 내 곁의 여자가 여자가 아니란 말인가. 이 무신 배반! 그러니까 그곳은 게이 bar였다.
저렴한 공사비 주면서 최대한 폼나기를 바라는 게 발주자의 마음이다. 서울 논현동 자재시장까지 훑어 독특한 수입벽지까지 바르고 생난리를 해서 두어 달 후 드디어 개업을 하였다. 예의상 우리는 하청업자와 기술자들을 몰고 가 술을 팔아주어야 했다. 술상무처럼 나도 꽃다발 들고 갔다.
나는 게이들이 그처럼 어여쁜 줄 처음 알았다. 서울에서 팀을 딱 짜서 데려온 여자(!)들이라는데 자태가 여자보다 더 여자같았다. 노래실력은 기본, 매너들도 세련되었다. 늘씬하고 피부조차 매끄러웠다. 그녀들의 이목구비는 또 얼마나 오밀조밀 이뻤는지. 손님들의 눈이 지루하지 않게 드레스를 수시로 갈아입었고 노브라 젖도 슬쩍슬쩍 보여주는 센스! 자신의 여성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제스추어, 분하게도 그녀들의 가슴이 나보다 더 볼륨 있다니.
여자인 나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여자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여자같이 보여야만 하니 각종 테크닉이 들어갔다. 의식적인 교태가 철철 넘치고, 몸을 필요 이상 꼬고, 입을 가리고 웃고, 굳이 살포시 나비처럼 앉고, 새끼손가락 펴서 얌전히 잔을 들고...그런 그녀들이 하나도 역겹거나 경멸스럽지 않았다. 정말이다, 나는 그녀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뻔했다. 좀 어색하긴 했다, 하하. 사실 구경하느라 얼마나 두리번거렸는지...촌티나게스리, 쯧.
아무리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아도 목소리를 변화시키기란 참 어려운 모양이었다. 젖도 커지고 수염도 없어지는데 목소리는 남성의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목소리는 끝까지 존재를 알리는 암호이다. 또한 목소리는 상징과 은유로 살아남는 것. 흔히'소신'을 '자신의 목소리를 내다'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저 할머니처럼 남성의 목소리를 낼 때 할머니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생각할까. 할머니는 더이상 여자로 분류되지 않고 단지 노인일 뿐인가. 흐르는 시간이란 참 가혹하다.
배미다리: 그 개업날 나는 남편 대신 양주를 디립다 마셨었다. 비싼 양주를 시키고 안 마시는 건 죄악이야 하면서. 헌이가 이미 내 뱃속에 있다는 사실은 술 다 깬 며칠 후에야 알았다... 미안하다 아들아, 엄마의 첫 선물이 너무 알딸딸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