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석가탄신일, 밥 먹다가

愛야 2010. 5. 21. 12:01
 

절다운 절에 가 본 지 꽤 되었다. 불교신자는 아니다. 불교에 대해 호. 불호의 감정도 없다. 이권과 정치에 휘말려 뉴스를 타는 모습을 보면 제발 안 저랬으면 싶고, 법정의 맑은 모습을 보면 제발 저랬으면 싶다. 나는 산자락에 누워 저잣거리의 사람들을 맞이하는 묵은 절이 좋을 뿐이다. 그곳에 수백 년 동안 성당이 있었다면 성당을, 교회가 있었다면 교회를 좋아했을지 모를 일이다.

 

절에 가도 중은 안 보였다. 관광객만 있었다. 중이 바로 불교는 아니었다. 종교적 직업의 하나로 보였다. 오래전, 수덕사 경내를 지나가는 너무나 잘 생긴 중의 귓구멍에 첨단 워크맨 이어폰이 틀어박혀 있는 것을 본 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도 직업일 뿐이라고.

 

누군가는 사과를, 누군가는 지식을, 누군가는 노동을, 누군가는 육신을, 제각각 먹고사는 문제와 교환한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숙명이고 의무이다. 다르다면 단지 그들은 수양을 하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일 뿐이다. 고상할 것도 덜 고상할 것도 없다. 결코, 비하하는 말이 아니다. 먹고 산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종교보다 우선되는 기본이 아닌가.

 

 

불교는 사찰에 존(存)하는가? 아니다. 불교는 경전에 존(存)하는가? 또한 아니로다. 불교는 실로 각인(各人)의 정신적 생명에 존재하며 그 자각에 존재하는 것 아닌가. 이 자각을 계발하여 각인의 가치를, 광명을 인정하는 길이 하나 둘이 아닌즉, 오인은 불교가 참으로 그 大理에 立하여 민중과 접하며, 민중으로부터 하기를 바라노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만해 한용운 <불교의 자치와 신생활의 개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신생활의 개혁은 늘 필요하고, 종교적 부패도 여전했나 보았다. 만해는 대승불교를 지향한 만큼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불교가 살아나리라 강론했다. 하지만, 우리가 불교를, 아니 중을 보는 시각은 예나 지금이나 고답적이다. 절이 산 속에 있는 한 불교와 중도 산 속에만 있어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진정성을 의심하기 주저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편견과 이기적인 대중들이다. 하지만 민중 속으로 너무 깊숙히 내려와 다툼이 끊이지 않는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력 다툼과 명예욕, 스스로 종교적 사업일 따름임을 자인한 꼴이다. 온갖 부패한 꼴 다 보여주면서도 좋게 봐 달라는 것은 욕심이다.

 

옛날, 학생들이 이렇게 말했었다.

"선생님, 중이 나이키 신발을 신고 가던데요?"

"그럼 중은 계속 고무신 짚신 신어야 하냐?"

"중이 소나타 몰고 가던데요."

"산 속까지 기차나 버스가 들어오면 안 몰 수도 있겠지, 이눔아!! 니나 졸지 마라."

 

그러나, 나는 아직은 절이 좋다. 절을 향해 가는 호젓한 길도 좋다. 하지만, 석가탄신일인 오늘 나는 절에 가지 않는다. 친구의 부름을 받잡고 술집으로 간다. 장소가 무어 상관이람, 나는 <그곳>에서 각성하면 된다. 만날 각성하려다가 미수에 그치는 게 탈이다.

 

 

 

 

 

 "Buddha Bar"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