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러미
버스에 올랐다. 두어 곳 빈 좌석이 보였다. 마침, 내리기 편한 하차문 옆 한 좌석이 비어.... 엇, 아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무엇이 있었다. 악기(첼로쯤)의 하드케이스가 좌석에 떡 기대어져 있었다. 악기의 주인 여자애는 그 옆좌석에 앉아 전화를 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한 자리 악기가 한 자리를 차지한 셈이었다. 꼭 그 자리가 아니라도 빈 좌석이 있었기에 나는 불편한 뒷좌석에 앉았다.
곧 연세 지긋한 여자 노인네 둘이 탄다. 역시 좀 전의 나처럼 그 악기자리에 와서 멈칫거리다 다른 자리에 앉는다. 한 할머니는 여자애를 째려보며 그냥 문 옆에 서 있다. 이제 빈 좌석은 다 차고 선 승객도 생겼다. 하지만 아무도 여자애에게 좌석을 비켜달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아까부터 염통 근처가 꼬물꼬물 간지럽고 있었다.
뒤통수를 퍽 갈겨버리고 싶은 마음. 저 여자애는 넓은 등판만큼이나 얼굴두께도 튼실하구나. 빈 좌석이 있을 때는 큰 악기케이스니 봐줬다만, 서 있는 승객이 발생하는 이 마당에는 악기케이스를 벽에 붙이든 지가 끌어안든 처리해야지 않나. 저 철판 mind는 요즘 아이들의 트랜드인가.
나는 멀찍이 서 있는 초로의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려다 갈등한다. 내 자리가 뒷부분 툭 올라온 불편한 곳이기도 했지만, 저 악기 주인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까 봐서다. '내가 모른 척 가만히 있으면 남이 다 알아서 해결해 준다.'
오머나, 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리하여, "아가씨!" 그만 여자애를 부르고 말았다. 여자애는 의외로 한 번의 부름에 단박 돌아봤다. "전화 그만하고, 케이스를 치우고 자리에 누가 앉도록 해야 하지 않아요?" 여자애는 전화를 퉁명스레 끊더니 악기케이스가 계.시.던 좌석으로 옮겨 앉아 케이스를 끌어안다시피 비스듬히 세웠다. 즉시 하나의 빈 좌석이 생겼다.
가끔 자신의 가방이라든지 짐을 좌석에 모셔두는 사람이 있다. 나는 곧잘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앉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히히. 나 심술쟁이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그러나 아무리 허드레 서민용 교통수단의 버스나 지하철이라도 염치가 있어야 한다. 경로사상 어쩌고까지 갈 것 없다. 1인분의 요금을 냈으면 1인분의 좌석을 사용하는 게 옳다. 텅텅 비었는데도 그래라는 뜻이 아니다. 바로 앞에 다른 승객이 서 있는데도 버젓이 짐보따리나 가방을 놓아두는 무신경함을 가진 자 말이다.
얼마 전 뜨거운 냄비뚜껑을 덥석 쥐는 바람에 엄지와 검지의 끝이 데었다. 피부가 딱딱하게 되어 껍질이 벗겨진다. 깨끗이 한번에 벗겨지지 않고 꺼칠꺼칠 일어난다. 그 거스러미가 스타킹을 잡아채고 니트 옷자락도 잡아당긴다.
내 마음에도 그런 거스러미가 있음이 분명하다. 남들 다 가만있는데 왜 나는 염통이 간지럽나. 왜 목구멍까지의 말을 삼키지 못하나. 무거운 악기케이스 좌석에 좀 세워 갈 수도 있지, 애가 힘들잖아, 조금 가면 어차피 다들 내릴 건데 하고 너그럽게 지나치지 않나.
마음의 거스러미도 화상 후 벗겨지는 중인가. 딱딱한 흉으로 굳지 않고 벗겨지는 중이라면 참으로 다행이다. 그런데, 매끈하게 되는 것은 확실할까, 거스러미 없이 촉촉하고 따스한 염통이 되는 건 대체 언제쯤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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