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구
#1.
제4차 열무김치 담그기 돌입.
어제, 벌레 구멍 송송한 여린 열무를 다듬어 팔고 있는 할머니를 봄.
처음에는 값만 물어보려고 했으나, 장마에 열무값이 더 오르고 어쩌면 아예 안 나올지도 모른다는 협박에 급 무릎 꿇고 요 무더기 주세요 했음.
오전 내내 씻고 절이고 국물용 물 끓이고 썰고, 사과는 썰다가 거의 다 집어먹음서 일함.
주방 순식간에 초토화됨.
고춧가루 양념을 주방 벽까지 날렸음.
몇십 포기 김치를 담그는 고수님들의 신공에 한없는 경외심을 표함.
#2.
내내 단골 김치가게에서 조금씩 사 먹어 왔다.
얼마 전 저녁,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막 발을 딛는 순간 1층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나왔다.
ㅡ 이제 퇴근하는갑네.
ㅡ 예. (접대용 웃음 흘림)
ㅡ 배 고프겠으, 내가 겉절이 했는데 좀 드릴까?
ㅡ 지금 가서 해 먹으면 되지요. 두고 드세요.
ㅡ 아냐, 맛은 없지만 갖다 드릴 테니 잡숴 봐.
ㅡ 아니아니, 정말 괜찮은데.... (진심임)
1층 아주머니는 곧 배추 겉절이와 물김치를 가지고 올라왔다.
나는, 임금님이 드신다는 <완도 진상각> 미역 큰 팩을 하나 꺼내 두었다가 물물교환을 하였다.
그녀는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은 유일한 이웃이었다.
그녀는 지난겨울 유방암 수술을 받고 막바지 방사선치료 중이었다.
다행히 초기였고 위치도 완전 절제를 요하지 않아서 겉모양을 살릴 수 있었으며 예후도 좋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 끝에, 미처 말릴 새도 없이 그녀는 훌러덩 티셔츠를 뒤집어 수술의 증거를 보여 주었다.
방사선에 시달린 피부는 감자껍질 같은 허물을 벗어가고 있었고, 겨드랑이에서 가슴 아래쪽으로 길게 흉이 나 있었다.
나는 목욕탕이 아닌 내 집 현관에서 타인의 늙은 젖을 보았다.
더이상 섹시하지 않은, 그러나 역사를 가진 가슴이 된.
그녀의 말은 진실이었다, 김치가 진짜 맛이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내 생전 그렇게 맛없는 김치를 처음 먹어 보았다.
어지간하면 음식 안 가리는 나, 입에 넣었던 음식을 비위 상해 뱉어보기도 처음이었다.
허여멀금한 겉절이 색깔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상한 쿰쿰한 냄새와 맛은 젓갈 탓인 듯했는데, 이 김치를 어찌 그 집 식구들은 먹을까 싶었다.
아직 익지 않아 그런가, 숙성되면 마술처럼 확 다른 맛으로 변하려나ㅡ했으나 내 상상일 뿐이었고 처음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었다.
문제는 도저히 못 먹겠으니 결국 버려야 하는데 하필 그녀의 집이 1층이란 점이었다.
들고 가다 또 마주치면 우뚜케 하나, 비닐에 싸서 버릴 수도 없고, 그냥 버렸다가 바로 내 뒤에 그녀가 버리지 말란 법이 있냐 말이다.
자기 음식은 척 한눈에 알아보는 법, 아뉘 이것이 내가 준 감치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이런 드라마가 떠올랐다.
꾀를 내었다.
김치를 먼저 버리고 그 위에 따로 한 봉지 들고 간 채소 다듬은 잎을 와르르 덮어 위장하였다, 이 삶의 지혜.
참 내, 이기 무슨 시츄에이션?
원하지도 않은 김치를 억지로 얻었다가 당당하게 버리지도 못하고 끙끙대는 어리바리한 내 꼴이라니.
젖까지 본 처지에 웬만하면 먹어야 도리겠지만 버릴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하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김치를 제일 못 담글 거라 굳세게 믿었었다.
하지만 나보다 주부경력 엄청난 1층 아주머니의 김치 맛을 보라.
흠흠~ 에잇, 나도 함 담가 보까? 설마 저것보단 맛있지 않을까?
그리하야 며칠 후 첫 열무김치를 담그게 되었던 것이었다.
다정한 1층 아주머니를 만나면 얼른 인사만 나누고 총총 가던 길 가야 한다.
또 김치 준다고 할까 봐서.
4차 열무김치도 잘 익었다, 일단 내 입맛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