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끓어오르기
#1.
오늘은 흰 법랑 주전자에 찻물을 끓이고 싶었어. 새 흰 법랑 주전자는 상자에 든 그대로 일 년이 넘게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을 테지. 찻주전자를 태운 후로는 전기 주전자만 사용했었거든. 전기 주전자는 절대 필요 이상 끓어오르지 않지. 끓기 시작하면 스스로 몸온도를 낮추려고 딸각 꺼져. 찻물을 오래 끓이는 편인 나는 늘 그게 아쉬웠어. 그러다 꾀를 내었지. 끓기 시작할 때쯤 전기 주전자 뚜껑을 열어. 그러면 전기 주전자는 원하는 온도에 도달하지 못해서 계속 끓지. 끓으면서 증발하고 증발하면서 낮아지고 낮아지면서 끓지. 나는 전기 주전자를 속여. 내가 주전자 뚜껑을 닫아줄 때까지.
흰 법랑 주전자를 언제 샀더라. 재작년 겨울이던가, 아버지가 전화를 하셨지. 너 이번 주말 올 때 찻주전자를 하나 사와라, 쓰던 거 태워서 못쓰겠다. 나는 모던하우스에서 흰 법랑 주전자를 사 갔어. 손잡이와 뚜껑 꼭지는 나무로 된 것이었어. 아버지는, 너무 하얗다, 무늬도 없구나 하셨지만 엄마는, 깨끗해서 좋구나 하셨지.
하지만 아버지는 이튿날 외출에서 돌아오시며 작은 법랑 주전자를 또 사오셨어. 알록달록 무늬가 있고 사이즈가 자그마했어. 뭘 또 사왔어요. 주전자가 몇 개야? 응, 니가 사온 건 니가 가져가 써라. 내가 사다드린 주전자가 마음에 안 드셨던 거야. 아부지가 사실 거면서 왜 나보고 사 오라 했으, 시간 들고 돈 들고 짐 되게. 나는 투덜대었지.
사실은 속으로 은근히 좋았어. 억지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사고 싶었던 주전자였거든. 그 핑계를 아버지가 제공해 주신 것일 뿐이야. 그랬으니까 환불하지 않고 내 집으로 가져온 것 아니겠어. 하지만 나는 우습게도 여태 그 흰 법랑 주전자를 사용하지 않고 있어. 표면상 이유야 있지. 쓰던 전기 주전자가 고장나면 그때 써려고. 그런데 일 년이 넘도록 전기 주전자는 고장도 안 나. 난 가끔 희고 둥근 주전자를 떠올리지. 오늘처럼 흐린 날에 찻물을 끓일 때는 더욱.
#2
나, 전기 주전자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