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그림 그리는 이의 작업실 근처를 우연히 지나갔었다.
그 작업실은 쇼윈도우를 통해 안이 훤히 오픈되어 있었다.
외장에 신경 쓴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반 점포였던 곳을 작업실로 얻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눈치였다.

오픈되었으니 봐줘야 예의 아니겠나.
나는 당당히 유리창에 코를 붙이고 서서 안을 구경하였다
작업실 안의 화가는 밖을 마주보고 앉아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나의 눈엔 그녀의 태도가 살짜기 과시성 제스추어로 읽혔다.
만약 내가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면 작업 중인 자신을 저렇게 내보이진 않을 텐데.
하지만 그건 내 입맛이고, 수강생을 모집하는 그림교실이라면 저런 태도와 구조도 필요할지 모른다.

수많은 붓을 보자 그녀의 그림에 바쳐진, 바쳐지는, 바쳐질 시간이 갑자기 부러웠다.
그녀의 흔적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남을 것이다.
무채색과 유채색, 채도와 명도, 그 혼합과 강약의 의미를 삶의 게놈지도처럼 품은 채.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성공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옆 집은 이미 폐업을 하였다.
문을 닫고 이삿짐만 어수선한 옆 점포를 들여다보았다.
주인은 떠나도 강렬한 색들은 존재를 뿜고 있었다.
흐트러져도, 번져도, 뭉쳐도, 표현된 색은 그 실존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
머릿속만 평생 떠다니다가 어느새 흐려지며 사라진 나의 것에 비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