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

철길 걷다

愛야 2014. 6. 13. 00:42

동해남부선.

반드시 완행열차라야 될 것 같은 노선.

이름에서부터 바다 곁을 달린다는 유혹으로 많은 추억을 남겼을 노선.

아쉽게도, 해운대에서 송정까지의 4.8km 아름다운 바다 구간이 작년 12월 1일로 끝이 났다.

부산 울산간 복선전철 개통으로 기존 해운대와 송정 역사는 폐쇄되고, 새로운 역을 지어 이사하였다.

낡은 驛舍를 뛰쳐나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해수욕장이 멀리 보이는, 그런 환희는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

 

대신 우리에겐 철길이 남겨졌다.

기차가 다니지 않은 가장 안전한 철길이다.

하필 바다를 끼고 도는 아름다운 구간이라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사람들은 삼삼오오 바다를 보며 철길을 걷는 새로운 경험을 즐기게 되었다.

 

 

그날은 해무가 많았다. 

한낮이 지난 오후 3시경이었는데도 수평선은 뿌옇고, 오륙도도 흐릿하였다.

멀리 낮은 산의 스카이라인을 울퉁불퉁하게 만든 범인은 초고층 아파트다.

하긴 저건 애교에 속한다.

조선비치 쪽에서 달맞이 고개를 바라보면, 억울하고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바다와 너무나 잘 어우러졌던 달맞이고개 라인에 뿔 난 듯 아파트가 올라가는 중이니까.(달맞이고개 높이+ 아파트 높이)

산구릉에 혼자 불쑥 솟은 모양은 주변과 따로 놀았다.

바다를 향해 달리는 초고층 개발을 개념 없는 도시가 허용한 결과 천혜의 자연풍광은 사라졌다.

이젠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

앞으로 무엇이 남을까.

 

해운대 끝자락 미포에서 청사포까지만 걷기로 하였다.

송정까지 걷기엔 내게 무리다.

미포 철길 건널목에서 청사포 방향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자동차 소음도 차단된 듯 주변이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나는 깜짝 놀랐다.

철길 둔덕 바로 곁에 사람사는 집이 존재하였다.

꽃은 분홍으로 제 색을 뿜고 있고 담 너머에서 개가 짖었다.

어엿한 문패와 주소가 달린 실제 주거의 집이었다.

자박자박 돌 밟는 소리에도 짖는 저 개는 그동안 얼마나 목이 터졌을까.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고는 하지만 그 소음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생활이 서글펐다.

  개조심 씨댁.

 

 

 

달맞이재 터널이다.

옆 벽면이 뚫려 바다가 보이는 매우 짧은 터널(이라기도 뭣한)인데, 저 터널이 왜 필요했는지 암만 봐도 모르겠다.

건너편으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도 아니고 그냥 폼으로...? 

 

낙서본능이 여기라고 피해갈 리 있나.

영희철수가 아니고 울엄마라고 해서 용서한다.

그 밑에 야가?때문에 혼자 키들키들 웃었다.

 

 

부녀끼리도 걷는다.

스치며 들리는 대화는 가정사로 아부지가 흥분하시는 중.

 

 

뒤에 가는 외국 아저씨는 빰 때리기 딱 좋은 쪼리 슬리퍼 신었던데 물집 잡히겠다.

시끄러운 중국 여자 둘을 막 지나쳤을 때이다.

우연히 바다쪽 숲을 흘낏 보았는데 덤불 뒤에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얼굴이 보였다는 말은 즉, 이쪽을 향해 서 있었다는 말이다.

보호색처럼 연두색 점퍼를 입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나는 응, 나무에 거름 주냐? 하였다.

하지만, 잠시 후 의아한 생각이 들며 머리가 쭈볏했다.

오줌이 급해 덤불 속으로 들어갔다면 분명 돌아서 있어야 옳다.

그런데 그는 사람 다니는 철길쪽을 향해 있으니, 결국 덤불에 숨어 우리를 보고 있는 셈이 아닌가.

헉!!!

혹시 바바리맨...?

아니 평온한 얼굴이던데...? ( 그럼 어째야 하는데? )

갑자기 호젓한 주변이 무서워진 나는 철길 침목을 바바박 속도 내어 밟았다.

널린 게 돌멩이고 무거운 카메라도 들고 있었으니 방어할 도구는 많았지만 그런 일에 내 무술을 쓰고 싶진 않았다.

때 맞추어 멀리 나타난 사람들의 소리, 어찌나 반가운지 모르는 사람에게 막 인사할 뻔했다.

세상에서 무서운 게 사람이요, 반가운 게 사람이다. 

 

곰곰 생각하니, 사람들이 뜸할 때는 범죄의 발생도 걱정되었다.

바바리맨들 사이에 떠오르는 핫플레이스로 소문이 나면 큰일이다.

아무쪼록 주말이나 사람들이 많을 때 떼지어 몰려가기 바란다.

 

 

저 멀리서 강아지 둘을 데리고 한 가족이 걸어온다.

강아지 한 마리가 마치 나를 아는 듯 미친 듯이 귀까지 펄럭이며 철길을 달려온다.

내가 사진을 찍자 아니다 싶었는지 우뚝 멈추어 서서 제 식구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나는 "이뻐라~ 이뿌다아!" 하며 사진을 찍었다.

물론 주인 들으라는 립서비스이며, 사진 찍기 위한 꼼수다.

갸는 사실 내가 특별히 안 이뻐하는 시츄였으니까.(멍청해 보여서 안 좋아한다는 말 차마 못하겠다.)

녀석이 다리를 휙 들고 영역 표시를 막 한다.

"야야, 니가 암만 그래봐야 여긴 국유지야!" 했더니 개 주인이 으하하하 폭소를 길게 한다.

내가 도리어 어리둥절, 내 말이 그리 감동적이었나? 싶다가 같이 웃어줬다.

 

 

드디어 청사포로 들어섰다.       

다시 철길 좌우에 집들이 나타나고, 커피와 막걸리를 같이 파는 집도 있음을 알려준다.        

철길 건널목이 나타나면 청사포까지 다 온 것이다.

 

 

멈추라는 자동차와 사람은 나날이 더 밀려들고, 결국 멈춘 것은 기차였다.         

이제 철길옆 집에서는 초저녁부터 깊게, 그리고 오래 잠에 들 수 있을 것이다.

 

홍백 쌍등대와 어선, 어구, 길가의 미역, 꽃나무보다 낮은 지붕, 풍경들은 청사포가 아직 어촌임을 말해준다.

화려한 해운대 도심 속의 어촌, 참으로 독특한 이 도시의 모습이다.

조개구이집이 즐비하게 북적대는데, 인심까지 어촌스러울지는 장담 못하겠다.

 

 

마을버스를 타고 나오려다가 버스 기다리는 시간에 걷기로 했다.

오르막길을 거의 다 올라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푸르고 빛나는 바다가 출렁거렸다.
진도 앞바다의 참혹함이 아직 진행형인데, 내 입에서 아름답다는 한탄이 새어나오고 말았다.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날 이후 스스로의 검열에 걸려, 바다를 사랑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다.

마치 벗겨진 살갗이 쓰릴까 두려워 옷소매을 내리지도 올리지도 못하는 꼴이었다.

그런데 바다는 여전히 이토록 눈부시고 아름답다니, 차마 부인할 수 없구나.

나는 천천히 신경줄에 힘이 생기나 보다.

피하지 말고 마주보며, 조금씩.

 

그렇다고 너, 그렇게나 크게 웃을 것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