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리, 기억 속의 그대

愛야 2014. 11. 2. 02:04

 

 

 

ㅡ테이블 위에 던져둔 그림 속에서 그녀가 묻는다.

 

           

<5일의 마중> 

출연: 공리 (아내 펑위안 役)   진도명 (남편 루옌스 役)  장혜문 (딸 단단 役)

감독: 장예모

연도: 2014년

원제 : 歸來(Coming Home)

 

 

오랜만에 중국 영화를 보러 갔다.

사실 중국 영화는 썩 좋아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중국영화를 단 한편도 보지 않았다.

진지한 영화는 지루하였고, 액션영화는 소란하였다.

<붉은 수수밭> <국두> 이후 중국 시대영화 특유의 어두운 배경과 색상, 늘어지는 전개에 질려서일 것이다.

물론 산뜻한 영화도 많을 텐데, 그런 작품은 왜 내 눈에 뜨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장예모 감독은 임권택 감독을 보는 기분이라면 좀 지나친가?

 

다행히 영화는 충분히 좋았다.

건너뛸 때와 늘어질 때를 조절하며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았다.

아쉽다면, 잘 만들어진 드라마 한 편을 보는 평범함이랄까.

머리 흰 칠에 의존한 엔딩 분장도 그들의 세계적 명성에 비해 부족하였다. (사소한 것에 천착하는 나.)

 

중국 문화혁명으로 남편 루옌스가 잡혀 간 후, 중학교 교사인 펑위안은 남편을 못 본 지 10년이 넘었다.

3살 때 아버지와 헤어진 딸 단단은 발레학교에 다니며 주인공 발탁을 위해 연습 중이다.

어느 날, 당국에서 남편이 탈옥했음을 두 모녀에게 알린다.

가족을 향한 루옌스의 절박한 몸부림, 그러나 그것이 모두의 삶과 꿈을 혼돈 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비 오는 밤, 펑위안은 누군가 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문 손잡이가 살그머니 돌아갈 때, 그녀는 탈출한 남편이 문밖에 왔음을 직감한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문을 열지 않았다.

루옌스는 문틈으로 쪽지를 디밀어 다음날 기차역 육교에서 8시에 만날 것을 알렸다.

딸 단단은 그 사실을 밀고한다.

아내 펑위안은 빵을 밤새 쪄서 그 장소로 나갔으나, 남편이 목전에서 끌려가는 것을 보고 몸부림을 친다.

 

수년 후 문화혁명이 끝나고, 남편 루옌스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아내 펑안위는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무려 20여 년을 못 만난 탓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정상이 아닌 듯하였다.

심인성 기억장애.

그녀에게 있어서 남편 루옌스는 옛날의 모습뿐, 눈앞의 중년과 남편을 일치시키지 못한다.

남편의 탈옥과 처절한 체포과정의 충격, 당원들의 폭력으로 그녀의 영혼은 깊이 멍들었다.

딸 단단은 부친의 탈옥 덕에 주인공 발탁에서 떨어진 후 발레학교를 그만두고 방직공장에 다니며 아버지를 증오하였다. 

 

자신의 탈옥으로 일어난 결과에 망연자실하였지만 루옌스는 그녀의 기억을 깨우치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다가갔다.

그가 5일 날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보내자, 아내는 피켓을 들고 기차역으로 마중을 간다.

루옌스는 이제 막 돌아오는 척 연기를 하며 역 쪽에서 걸어 나왔다.

상황을 설정하여 남편임을 인지 받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그를 스치며 다른 누군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비록 남편을 알아보진 못했으나 아내는 이 편지를 마음 깊이 각인하여 매월 5일엔 마중 가기를 거르지 않게 되었다.

그 애절함이라니... 그녀의 현실 속엔 젊은 남편과 발레학교에 다니는 딸만이 존재했다.

루옌스는 이웃집 남자로, 편지 읽어주는 아저씨로, 피아노 수리기사로, 여러 가지 역할로 나타나 그녀를 보살핀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누구세요 하고 묻지만, 루옌스는 더 이상 남편으로서의 나를 우기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다면, 이 현재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그 또한 받아들인다.

 

세월이 흐른 어느 5일, 늙고 쇠약한 펑안위를 휠체어에 태우고 루옌스는 묵묵히 기차역으로 간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젊은 자신을 마중하러 가는 것이다. 

이제 그는 아내의 남편이 되기 위해 마주 걸어오지 않는다.

그녀 곁에 나란히 서서 젊은 루옌스의 귀가를 함께 기다릴 뿐이다. 

오직 그녀의 마음 그대로가 되어서 말이다.

 

허황되거나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시간이 가져다 준 것 외엔 아무 해결이 없으니까, 그것이 현실 아니던가.

끝없는 기다림이란 가혹한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맞으며 한 곳을 향해 선 두 사람은 더없이 안정되고 따뜻해 보였다.

서글퍼하지도, 절망하지도 않는 하나의 의식처럼.

 

사랑이 대체 무엇일까.

네가 너무 보고 싶으니 너의 의사와 상관없이 너에게로 갈 것이고, 내가 너의 남편이므로 너는 나를 알아보아야 한다.

당신은 엄마이니 나를 위해 희생해야 하고, 너는 자식이니 부모가 만든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심지어 봉사조차, 봉사를 함으로써 내가 흐뭇해지는, 바로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루옌스가 탈옥하지 않았다 해도, 그건 가족을 덜 사랑해서가 아닐 것이다.

반대로, 그가 탈옥까지 감행하며 보여준 미칠 듯한 몸부림이 과연 가족을 사랑한 결과가 되었던가.

기댈 변명이란, 모든 건 운명이야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 이 말뿐인가.

 

랑은 자신의 애닯음, 그리움, 뜨거움의 일방적 감정 해소다.

애초에 사랑이란 놈이 그리 생겨 먹었다.

루옌스는 자신의 사랑을 평생에 걸쳐 속죄하는 듯했다.

도망 온 루옌스를 문밖에 세워두었다는 죄책감으로 그 후 한 번도 문을 잠그지 않는 그녀도.

 

 

 

 

ㅡ요 사진은 Daum영화에서 가꼬 왔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