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같은 존재
엄마를 간병하신 지 20년만에 엄마의 요양병원 입원을 허락하셨던 아버지는 며칠만에 취소했다.
이유는 엄마 본인이 싫다 했기 때문이란다.
그거야 당연한 반응 아닌가,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말이다.
무엇보다, 두 분을 한시적이라도 분리해야 아버지가 쉬며 추스릴 수 있다.
엄마에게 필요한 24시 간병인이 가능한 시스템은 병원밖엔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엄마는 병원에 가서 배 아픈 것을 검사하고 싶다더니 그새 마음이 바뀌었다.
이것이 엄마가 예전과 달라진 점이다.
아버지가 힘에 부쳐 쓰러졌는데도 엄마는 자신의 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너거 아부지 쓰러질까 걱정이 된다고 말만 하지 정작 늙은 남편을 위한 감내나 양보는 없었다.
그저 이제 집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가 이유의 다였다.
맞긴 맞다.
하지만 그너무 <집>.
집,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침대로 돌아오면 뭘 할 수 있는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집에 있다가도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이 당연하고, 대부분 그곳에서 죽는 세상이다.
어른들의 <집>을 향한 대책없는 집착이라니, 깊이 한숨이 난다.
다시 원점이 되었다.
3개월째 일요일마다 시외버스를 타고 친정에 가서 하루를 보내고 오는 나는 점점 죽음이 친근해진다.
앙상하게 마른 엄마의 몸뚱이.
수분이라곤 한 방울도 없어 보이는 피부와 세포.
나는 엄마에게서 나의 미래를 보고 엄마는 나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본다.
내가 엄마를 가장 많이 닮았으니 우리는 더더욱 그렇다.
어린 아이처럼 무구한 눈을 마주보며 엄마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들고 일어난 회색 머리칼도 넘겨드린다.
나와 찍은 듯 닮은 손도 쓸어본다.
사랑한다.
아, 훗날 슬프지 않을 만큼만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