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가을이 일찍 올 것 같다.
#1
창밖을 보라.
햇살이 뜨겁다, 그러나 얇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시무시한 더위도 순해졌다.
시간이 또다시 흐르고 있는 것이다.
#2
참, 포도를 마저 씻어야겠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비닐봉지를 꺼냈다.
포도 봉지 안에서 포도 세 송이 외에 반으로 접힌 천 원짜리를 발견했다.
하나 둘 서이 너이, 4천 원이다.
포도가 이런 식으로 알알이 새끼를 쳐 주면 소름끼치게 고맙겠구먼.
난데없는 돈의 출현에 셀프 수사가 시작된다.
지난 토요일, 마트 계산대 앞이 얼마나 붐비던지 서너 가지 내 물건이 계산원에게 미안하기조차 했다.
거슬러 받은 돈을 가지런히 지갑에 챙기기는커녕 마음이 급해져 얼른 그 자리를 비켜줘야 할 것 같았다.
연방 카트를 밀고 나오는 뒤 타자는 산더미 같은 물건을 쏟아놓은 터였다.
나는 되는대로 포도 봉지 안에다 돈을 넣었다.
그리고 계산대를 돌아서는 순간 그 사실을 잊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참 그렇다.
집에 오자마자 포도를 한 송이 꺼내 씻었는데 그때는 왜 발견 못 했는지 절대 이해불가다.
2박 3일 갇혔던 천 원짜리 지폐는 축축하였다.
집게에 집어 말린다.
흔들리며 꼬들꼬들해져 가는 4천 원을 본다.
4천 원이 마르자 나는 돈을 걷어 집앞 편의집에서 하이트 2캔과 감자칩을 사 왔다.
맥주를 마셔도 땀이 흐르지 않았다.
좋았어, 오랜만에 맥주로 배를 불리는 거야.
어쩐지 올해는 가을이 일찍 시작될 것 같았다.
아니면 벌써 시작된 걸까.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흐르니 나 여기까지 당도했다.
온갖 빈티지풍이 유행이더만, 사람만 빈티지가 골칫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