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미련하고 소란하게

愛야 2020. 2. 13. 00:34


#1.

지난 연말 한 달 넘게 집을 비웠던 후유증을 나의 냉장고가 호되게 겪었다.

처음 돌아와 냉장실 내용물이 약하게 얼어 있음을 알았을 때, 그건 당연하다고 여겼다.

꽉 닫힌 채로 한 달 넘게 견디었으니 이 정도는 얼어줘야지.

이젠 냉장고 문을 하루에 수없이 열고 닫을 테니 곧 녹아내릴 거야.


녹아내리지 않았다.

나는 A/S를 부르기에 앞서 일단 냉동과 냉장 온도를 최저로 돌린 후 지켜보기로 했다.

차차 냉장칸 음식물 어는 정도가 줄어 안도하던 어느 날, 야채 박스 속 야채가 모두 꽁꽁 얼어버렸음을 알았다.

차가운 물이 냉장고 뒤 벽면을 타고 흘러내려 야채 박스 밑바닥에 얼음판을 만들었던 것이다.
A/S를 부르기엔 설 명절이 이미 코앞이었고, 더욱이 설 장보기로 냉장고는 꽉 찼다.

야채 박스를 바깥으로 뺀 후, 그 자리에 고이는 물을 닦고 얼음을 떼어내며 명절을 보냈다.


#2.

결론을 말하자면, 수리기사를 부르지 않고 어찌어찌 노력하여 무사히 원상태 회복시켰다.

그러자니 냉장고 속 명절 음식을 빨리 소진해야 해서 나 홀로 무지막지 먹어치웠다.

돌아오는 명절부터는 절대 음식 안 하리라, 소화제 드링킹 하면서 결심하였다.


나의 맥가이버 정신을 친정 언니에게 말하자 언니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니도 참 미련하다, 퍼뜩 A/S 불러 고칠 일이지, 물 닦고 얼음 떼낸 기 자랑이가, 쯧쯧."

글쎄다, 이제는 모든 절차가 성가시고 귀찮았을 뿐이란다.


#3.

명절을 지나자 세상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시끄럽고, 인간은 참 속절없다.

악순환이다.

인간의 무분별함이 새로운 변종들을 만들고, 공격당하며 존재를 알고, 퇴치하고, 또 등장하는.

되도록 외출을 삼가며 나갈 때는 마스크를 굳세게 쓰고 다니니 편한 점이 있다.

화장이나 하다못해 립스틱도 필요가 없다.

저녁 운동할 땐 다소 불편하지만, 마스크 안쪽에서 헉헉 숨을 쉬며 이 미.련.한 인간은 잘 적응한다.


냉장고 파먹기와 바이러스 시절을 지나느라, 나는 2킬로그램 살을 찌웠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