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러記

부스러記 16, 여름

愛야 2020. 7. 21. 02:28

  2020. 7. 3. 금

냉장고의 음식물이 그다지 차지 않다.

오늘 아침엔 이틀 전 담근 김치가 쉬어버린 것을 알았다.

비가 와서 내내 썰렁했기 때문에 이틀 만에 쉬어버릴 더위가 아니다.

 

이번 주말에 휴가로 내려오겠다던 아들은 회사에 일이 있다고 2주일 후에나 오겠다 한다.

그래라, 이 엄마는 너의 출현에 목매지 않는다.

아들 오기 전 미리 담근 김치가 마침 쉬어터졌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

꽁꽁 야무지게 얼어있는 멀쩡한 냉동칸 온도를 두 단계 올려 본다.

아래 냉장칸까지 영향이 있기를.

 

  2020. 7. 7. 화

몇 달 전 언니가 시골産 참기름을 큰 페트병으로 한 병이나 주었다. 

혼자 참기름에 밥 말아먹을 수도 없어서 개봉도 않고 냉장고에 두었다가 얼마 전 소분하였다.

참기름집에서 파는 기름병으로 거의 5병가량 되었다.

3병을 잘 묶어서 지인들과 나누었다.

그중 한 사람이 오늘 청과물 도매시장에 다녀온다며 싱싱한 토마토 한 상자를 갖다 주었다. 

 

그녀도 지난번 상추 받은 나처럼 참기름이 부담스러웠을까.

나에게는 정말 아무 것도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럴수록 좋은데.

앞으로 물물교환은 그만해야 되겠다.

 

  2020. 7. 17. 금

마트는 블랙데이 세일이라고 붐비고 소란하였다.

마트 계산대에 내가 산 물건을 올려놓은 후 앞사람 계산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뒤에서 누군가가 말하였다.

저, 이거 하나인데 먼저 하면 안 될까요?

돌아보니, 한 여자가 소스병 하나를 들어 보이며 나에게 양보를 원한다.

나도 너댓 가지 단출한데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은 물건이 하나이니 먼저 하게 해 달란다.

살짝 어이가 없어서 하나고 백이고 차례대로이니 거절하려다가 언뜻 여자의 다리가 불편해 보였다.

장애가 있어 보이는 두 다리로 계산대에 의지해 서 있었고, 전동휠체어는 저만치 놓여있었다.

계산대 좁은 통로로 덩치 큰 휠체어가 들어와지지 않으니 내려 버티고 선 모양이다.

변명처럼, 휠체어가 계산대로 못 들어오네요 중얼거린다.

나는 마치 착한 여자처럼 흔쾌히 먼저 하시라며 소스병을 내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앞 사람에게, 내가 몸이 불편하니 니가 양보해 주렴, 말했을까?

위급하지도 않은 소스 한 병을 이유로?

절대 못 함.

큰 전동 휠체어를 몰고 소스 한 병을 사러 대형마트에 갈 수는 있다.

그러나 계산대에서는 공평하게 내 순서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 사회적 룰은 장애와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배려'나 '도움'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앞 사람의 자발적 양보가 아닌 다음에야 결코 내가 먼저 양보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불평등과 차별이라 함은 본인이 힘들 때만 적용되는 것인가?

 

  2020. 7. 18. 토

비 오기 전에 산책이나 갈까.

참으로 오랜만에 오륙도 한 바퀴.

꽃들은 세찬 해풍에도 피고, 흔들리고, 마르고 있었다. 

 

 

 

 

 

 

이 사진은 몇 해 전 핸드폰으로.

한낮 더위에 인적은 없고

붉은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