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만의 해후
2년 전쯤에 마트 와인 코너에서 붉은 포도주를 한 병 샀었다.
과일주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왜 샀는지 모르겠지만, 따지 않은 채 냉장고 아래칸에 내내 서 있었다.
2년 동안 술을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와인을 사고 얼마 되지 않았던 11월 초, 나는 간단한 암수술을 받았다.
몇 개월 후 진료시간에 의사에게 물었다.
"와인 정도는 마셔도 되나요.?"
"1주일에 소주 한 잔 정도요.... 그런데 암세포도 함께 환호하겠죠?"
아, 이건 마시지 말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지.
나는 사 둔 포도주 포함 세상의 모든 술을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진정한 술꾼이 아니었던 거야, 그런데 왜 포도주를 볼 때마다 쓸쓸하고 지랄일까.
생각해 보니, 오래전에 대학병원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받았을 때도 치과의자에 누운 채로 물었다.
선생님, 술은 언제부터 가능한가요?
젊은 의사가 얼마나 황당할지 상관없이 단지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었다.
안 마시는 것과 못 마시는 것의 정신건강적 차이는 엄청날 테니까.
언젠가 친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너 옛날 헌이 가졌을 때 커피조차 안 마시더라, 커피 들이켜던 니가 딱 끊는 거 보고 놀랐다."
"응, 그건 호르몬 덕분이지 결코 내 의지가 아녀."
술은 호르몬 덕 볼 것 없는 사안이지만, 기호품을 못 참아 하는 체질은 아니어서 감사하였다.
매일매일 비가 왔다.
아침마다 빗소리에 눈을 뜨고, 빗소리 들으며 불안한 잠에 들었다.
운동을 멈추고, 장보기도 멈추고, 일상을 숨죽였다.
하루 두 끼를 먹고, 세 번의 약과 한 번의 비타민을 챙기고, 커피잔을 들고 서성이고, 재난속보와 영화를 보았다.
그러다 어제 갑.자.기 냉장고의 포도주를 따고 싶어진 마음도 비 탓이라고 우겨볼까.
하하, 그러기엔 내가 나이가 너무 많다.
이유는 오직 아직 멀쩡한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땄다.
봉인되었던 향기가 코르크에 딸려 올라왔다.
술 먹는 하마 아닌 깊은 산속 토끼처럼 조금씩, 딱 세 모금을 먹었다.
나는 내가 감격으로 몸을 부르르 떨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포도주는 상상만큼 달콤하지 않았고, 오히려 떫고 텁텁하였다.
그렇든 말든 이미 목구멍을 떠난 포도주는 번개의 속도로 피돌기를 했다.
내 세포는 습자지처럼 알코올을 빨아들여 순식간에 두피에서 손가락 끝까지 도달시켰다.
달랑 세 모금에 열감과 나른함이라니, 진땀이 조금 나고 손발에 힘이 빠지며 식욕도 달아나 버렸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원래 과일주를 싫어했다 쳐도, 2년 만에 영접한 알코올인데 너무 한 거 아녀?
나는 가차 없이 코르크를 막아 냉장고에 다시 세웠다.
상상대로 달콤하고 행복했다면 하마로 변신했을지 모르지만, 토끼로 남아도 미련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남은 포도주를 쏟아버리진 않았지?
먹지도 않으면서 버리지도 못하는?
갇혀진 향기일지언정 거기 그렇게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