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 따위
#1
저녁 설거지를 한다. 가스레인지 주변도 닦는다. 가스밸브를 보니, 이미 잠겨져 있다. 보통 낮에는 밸브 연 채로 지내다가 저녁 설거지를 마치며 잠그는데, 밸브가 이미 잠겨 있다는 말은 즉 어제저녁에 잠갔다는 뜻이다(어쩌면 그저께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종일 가스 켤 일이 없었다는 증거다. 절기 寒食도 아닌데 나는 찬 음식을 먹었나? 그럴 리가. 전자레인지와 커피포트를 이용했을 뿐이다. 아침은 빵이었으니 더욱이 가스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뜬금없이 마음이 일렁, 하네.
#2
샤워를 한 후 얼굴의 물기를 닦으려고 거울을 본다. 그런데 오른쪽 콧구멍에서 입꼬리 쪽으로 흘러내린 연한 분홍색 물줄기는 뭐지? 설마 혹시....? 흰 휴지로 닦아보니 아주 연한 코피 아닌 코피 같은 피다. 며칠 전부터 콧속이 건조한지 조그만 피딱지가 나오곤 하더니 샤워 물기에 피딱지가 풀어져 흘러내린 것 같다. 와중에, 개그맨들의 콧물 분장이 이해되어 히히 웃었다. 얼굴 골격대로 연분홍 물줄기가 옆으로 날리듯 휘릭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코로나가 한창 극성일 때 오른쪽 콧구멍에서 작은 피딱지가 코 풀 때마다 나와서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었다. 나이 지긋한 의사는 내 콧속 점막이 조금 헐었다며 약 묻힌 원통형 솜으로 콧구멍을 꽉 막아 주었다. 웃기게 양쪽 콧구멍을 다 막았다. 내가 의사에게 우째 숨을 쉽니까 하소연했건만 의사는 웃으며 주의만 주었다. 절대로 코를 풀지 말고 절대로 코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밤에 세수하니 솜은 젖어서 저절로 빠졌다. 그 후로 나는 코를 거의 풀지 않았고 콧속을 후비지도 않았다. 흘러나온 맑은 콧물만 슬쩍 훔칠 뿐이었다. 하지만 왜 그런 때 있지 않나. 너무나 코를 풀고 싶을 때, 강력한 한 방의 '팽'이 필요할 때 말이다. 샤워하면서 무의식적으로 팽을 하였을까.
나는 코피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이를테면, 일이 힘들거나 몸이 고단할 때 주르륵 터진 코피에 깜짝 놀라 아무렇지 않은 척 콧구멍을 막는, 그렇지, 드라마틱한 코피 말이다. 하지만 나는 평생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코피를 흘려 본 적이 없었다. 혓바늘이 돋고 입안과 목구멍이 부어봤자 그건 아무도 알지 못하고 나 혼자서만 죽을 맛이었다. 대외적으로 폼나는 코피나 물집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아참, 중학생 때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뒷걸음치던 학생의 휘젓는 팔꿈치가 내 코를 가격한 적이 생각났다. 그때 참새눈물 같은 코피가 1초쯤 났었다. 하지만 그런 외부적 타격은 내가 말하는 그 코피가 아니므로 경험에서 뺀다.
이제는 코피에 대한 로망을 버린 지 오래다. 오히려 코피 날까 봐 무섭다. 조그만 피딱지에도 간이 철렁했다는 말이다. 코피가 어느 날 주르륵 흐른다면 119에 연락하거나 응급실로 가야 할 것이다. 머리나 어디 혈관이 터졌나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나이 먹을수록 기꺼이 버리는 것이 어찌 집의 살림살이뿐이랴. 로망이든 낭만이든 미련없이 버려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끔 실없이 마음이 일렁,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