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가는 날이 장날

愛야 2005. 10. 4. 09:52

 

 

지하철역에서 이여사를 만났다.

내 딴에는 서둘렀지만 20여분이나 늦었다.

범어사역에서 내려 우리는 김밥과 물과 맥주 두 캔을 샀다.

산 아래 종점에서 범어사 산문까지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내리니 아이구야, 온 산이 시끄럽기 짝이 없다.

산길을 따라 꽂혀있던 깃발들에 <개산문예축제>라고 쓰여 있다.

하필 사찰축제인 것이다.

노래자랑이 불이문 바로 아래에서 무르익고 있었다.

도대체 사찰 문앞에서 왜 노래자랑을 해야 하는지 몰라 잠시 서서 구경을 해 본다.

그 아래에선 사찰음식과 함께 먹거리 장터가 한창이다.

아이들은 절구경을 하기도 전에 어묵을 먹고 닭꼬치를 먹고 육개장 사발면에 코를 박고 있었다.

 

절마당으로 올라 갔다.

다비식시연이 있다고  절마당 가득 단상을 설치하고 커다란 탱화를 여러 폭 높다랗게 걸어 두었다.

다비식은 직접 본 적이 없으므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좁은 마당에 내빈용 의자가 배치되어 있고 방송국 카메라도 보여 포기하였다.

그야말로 試演 ,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보여주기 위한 맛보기 행사일 뿐인 듯해서다. 

언제 시작할지 몰라 무작정 기다리기도 싫었고 카메라에 찍히기엔 준비가 안되었다. 

 

대웅전 가득 사람들이 절을 하고 있었다.

대웅전뿐 아니라 모든 佛前이 치켜든 엉덩이들로 빼곡했다.

절 할래? 이여사에게 물었다.

싫어.

그녀는 이런 거 안 한다.

나는 절에 가면 왔다는 신고조로 가끔  3배 하고 시주함에 천 원 정도 넣곤 한다.

친정엄마와 할머니가 절에 다니시던 것을 추억해서다.

오늘은 저 비좁은 공간에  내 엉덩이마저 비벼 넣고 싶지 않다.

절마당 가장자리로는 판화 전시를, 대웅전 맞은편 건물에선 보자기 전시회 준비를 하고 있다.

보자기와 불교와의 관련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30분 둘러보니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이러려고 범어사에 가자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연휴라 남들이 다 산이야 들이야 하니 우리도 어디 놀러라는 것을 가보자 하였다.

멀리 가고 싶었지만 집안일이 있어 그러진 못하고 가까운 곳에  가자 한 것이다.

버스 타고 산 중턱까지 가니 덜 힘들고, 절구경도 오래간만에 하고 싶었다. 

연휴에  범어사를 택한 것부터가 무지의 소치였다.

 

우리는 계곡으로 향하는 넓직한 바위에 앉아 사 온 김밥을 안주 삼아 맥주로 목을 축였다.

절에 와서 술 마시는 것도 뭐 괜찮다.

노래자랑이 끝났는지 조용했다.

비로소 산바람이 한 줄기 불어 왔다.

내려갈 땐, 잘 닦인 길을 걸어가기로 한다.

 

앞에 한 남자와 여자가 가고 있다. 

꽤 나이들어 보이는 중년의 남녀이다.

뭔지 서먹해 보이면서도 느끼하고 은밀한 분위기를 풍긴다. 

둘 다 정성껏 차려입은 정장차림이다.

남자는 양복저고리를 벗어 신성일처럼 어깨에 척 걸쳤다.

여자도 하이힐에 핸드백을 들고 비틀거리는데, 그때마다 남자는 팔을 벌려 여자를 보호한다.

연신 여자의 팔을 끌어다 자신의 팔에 올려놓는다.

우스워 죽겠다.

부부라면 절대로 저런 복장으로 함께 와서 영화 안 찍는다.

여자는 우리의 시선이 민망한지 (맹세코 안 째려 봤으요..) 남자의 손을 어깨에서 털어낸다.

 

구불구불 내려오는 길 곳곳에 길카폐가 즐비하다.

어디서나 먹고 마시는 곳은 너무 많다.

이여사와 나는 그들의 수입이 자못 궁금하다.

얼마나 벌까, 자판기에 비하면 을매나 비싸냐, 카푸치노는 이천 원이나 하던데... 그러다가 우리도 이런 데서 장사해 볼까로 발전한다. 

숲 사이로 따로 난 등산길이 있는데, 곳곳에 평상과 간이의자를 두고 동동주며 부침개 등을 팔고 있었다.

산꾼들의 허기를 위한 인류애적 발상이다.

아, 저거다, 우리도 저 장사할까, 부침개 정도야 선수지, 국수도 좋겠다, 천 원짜리라야 손쉽게 먹을 거야, 가만있자, 옥호는 쌍과부집으로 하자, 산꾼들이 미어터질걸... 이 대목에서 우리는 으하하 크게 웃었다.

꿈도 야무진 사업구상이 난무하는 가운데 어느새 산길도 끝나고 있었다.

 

길을 가다보면 각종 종교들의 포교행위들과 마주친다.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불교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찾아오는 중생들만 구제하기엔 부처의 뜻이 너무 컸을까, 무슨무슨 사찰축제가 범람한다.

사바세계의 어지러움을 도량으로 꼭 끌어들여야 대중들과 함께하는 것이란 말인가.

나는 종교가 없으며 더불어 종교적 편견도 없다.

누구든지 마음의 주파수가 맞는 종교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각자 선택할 일이다.

단 하나 공통선이 있어야 한다면, 자신의 행복만큼 남의 행복도 인정할 것, 내 평화와 남의 평화가 함께 가야 한다는 것.

그  행복과 평화로 가는 길은 강요나 선전이 아닌, 오롯이 자신만이 찾아갈 수 있는 길이다.

누가 내 행복과 평화를 재단할 것인가.

아직은 죄 지을 일이 더 있을 것 같아 아무 종교도 가지지 못하는 나, 언제쯤 정신을 수양할 수 있을지, 원...

 

올라갈 때보다 내려오면서 종아리가 뭉쳤다.

인생과 같다.

잘 내려와야 아프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