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김치 담記

愛야 2005. 11. 6. 13:59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만, 이 나이 먹도록 여느 주부들처럼 김치의 달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달인은커녕 몇 번 담지도 않았습니다. 

갓 결혼해서는 친정에서 가져다 먹었지요.

내가 가지 않아도 엄마가 알타리김치며 물김치며 파김치며, 다양한 것들을 무겁게 들고 오시곤 하였습니다.

 

제가 이사를 오고, 어머니 또한 병을 얻으시면서 얻어다 먹는 좋은 시절도 막을 내렸습니다.

난한 자립의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저도 전혀 노력을 안 한 건 아니랍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제가 만든 김치보다 사 먹는 김치를 더 좋아라 하고, 식구도 워낙 단출한지라 자연 경제적인 쪽을 선택하게 되더군요. 동네 단골집을 정해 놓고 조미료는 넣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는 것이 김치를 위한 유일한 노력인 셈이지요.

이제 와서 말입니다만, 처음 몇 차례의 실패와 야유에 힘입어 잽싸게 사서 먹는 쪽을 선택한 저도 문제였지만, 저를 향한 못미더운 눈초리도 서운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얼마 전 깍두기를 담갔습니다.

고등어를 조리고 남은 무우인데, 무얼 할까 고민했습니다.

언젠가처럼 다 시들고 쪼그라져서 부끄러워하며 버릴 순 없잖습니까.

요즘 연일 기생충알이 김치에서 발견되었다고 나라가 시끄럽지요.

맨처음 중국산 김치에서 발견되었다고 뉴스가 떠들 때 제가 아들보고 그랬습니다.

아이고, 우리 나라는 뭐 별다를 줄 알고,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치기로는 우리나라도 만만찮을 거로....

과연 몇 일 후 국내산에서도 나왔다고 국제사회가 뒤집어져서는 난리도 아니더군요.

이따위 시사성 발언을 하자는 것은 아니니, 다시 제 김치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들에게 김치를 사서 먹인다면 너무 성의가 없어 보이질 않겠습니까.

엄마로서의 체면도 생각해 볼 문제이기에 다시 한 번 김치에 도전해야겠다, 결심한 것이지요.

 

깍두기이니 당연히 깍둑썰기로 썰어 굵은 소금을 설설 뿌립니다.

너무 짜게 간이 밸까 노심초사 뒤집어 놓습니다.

젓갈에 고추가루를 미리 개어 두어야 색깔이 빨갛게 돋아납니다.

풀도 쑤고 실파도 다듬습니다.

마늘은 즉석에서 마구 찧어야 향이 삽니다.

이론상으론 달인과 많이 비슷합니다.

 

크긴 하지만 한 개도 채 안 되는 무우로 깍두기를 담는데 시간과 재료 노력 들어갈 건 다 들어갑니다.

드디어 버무립니다.

이때 아들이 처음 보는 광경을 신기한 듯 구경하더니

"우짠지 맛 없을 거 같다." 

헐, 미리 초를 칩니다. 

칭찬을 하면 이 엄마도 춤출텐데, 도움이 안 되는 녀석입니다.

보기는 빨가니, 전문가의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 일 주일 동안 나는 소태처럼 짠 깍두기를 먹었습니다.

깍두기라 찌개도 전도 못해 먹고 밥만 많이 먹게 만들었습니다.

이번도 역시 성공은 아니었지만, 김치 담그기에 대한 두려움은 조금 사라졌습니다.

 

어제 다시 배추를 자그만 것으로 한 포기 샀습니다.

김치양념이 남아 버렸거든요. 

도전은 또 다른 도전으로 이어지는구나 싶습니다.

"점점 통이 커지네 우리 엄마, 배추에도 도전하시게?"

배추 한 포기로 어미의 사이즈까지 가늠하는 아들넘입니다.

절여진 배추를 씻어 물기 빼는 사이 아들과 밖에 나가 돼지국밥을 한 그릇씩 사 먹고 돌아왔습니다.

비가 오니 국밥이 제격입니다.

 

녀석은 나이답지 않게 돼지국밥을 좋아합니다.

저는 즐기지 않지만 아이 혼자 사 먹어라 할 수 없으니 같이 가야 합니다.

양이 많아 아이 그릇에 고기를 자꾸 덜어 줍니다.

저렇게 먹고도 얼마 안 가 또 배고파 할 겁니다. 많이 자랄려나 봅니다. 

하지만 밥 차려주기 귀찮은 어미는, 개그프로를 보며 갤갤 웃는 녀석에게 말합니다.

"웃지 마라, 움직이지도 말고, 배 꺼질라!"

"엄마, 그 말이 더 우습다,"

웃지 말라니까 녀석은 더 웃습니다.

 

물기 빠진 배추에 살살 양념 발라 김치통에 넣으니 맞춘 듯이 꼬옥 한 통입니다.

배추 한 포기만 사도 충분합니다.

아직 익지 않아 맛은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기생충 덕분에(?) 다시 김치를 담고 보니 참으로 뿌듯합니다.

사실 동네 단골집은 염려할 바  없는 안심표 김치를 담가 줍니다.

다만 나에게 있어 김치는 미루어 둔 숙제처럼, 언젠간 다시 넘어야 할 고개였을 겁니다.

먼 훗날 며느리에게  맛있는 김치솜씨를 뽐낼 수 있기를 바라는 거지요.

 

미루기만 하기에는 세월이란 놈이 너무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서둘러 가기에는 두 번 오지 않을 세월이지요.

이젠 그때그때, 가장 적절한 순간에 적절하게 일을 해치우렵니다.

게으름이라는 복병만 안 만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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