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늦잠 잔 아들이 깨어 내 방으로 비몽사몽 들어온다.
픽 내 이부자리 위에 쓰러지더니 그 상태로 한참 잠을 쫒는다.
잠 쫒는 수단은 T.V 에니메이션 채널이나 농구다.
녀석은 아직 나에게 아침인사도 안 했다.
"어머님, 밤새 기체 평안하셨습니까?"는 꿈도 꾸지 않는다.
조금 양보하여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굿모닝이라고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드뎌 아들이 첫 입을 연다.
엄마, 밥 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새끼다.
그 중에서도 밥 달라는 새끼의 입이 제일 무섭다.
아들이 하루 세 끼를 집에서 해결하는 방학이 나는 정말 힘든다.
자식 밥 먹이는 일은 어미의 기본인데 그걸 힘들다 하니 나는 기본이 안 된 어미인가 싶다.
도무지 오늘은 또 뭘 해줘야 하나, 그 뭐가 뭔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점심을 학교에서 먹는 평소엔 저녁밥과 약간의 간식만 준비하면 되었는데 , 요즘은 점심 주고 30분 후 엄마 배 고파, 하니 기가 찼다.
점심도 그렇다.
녀석은 하루 중 처음 먹는 밥은 시간에 상관없이 아침이라는 주장이다.
늦은 아침부터 시작하여 밤 늦도록 다 챙겨 먹일려면 얼마나 피곤한가.
물론 한창 먹을 시기라는 것은 안다.
안다고 해서 내가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일하는 엄마인 나로선 방학이 버겁고 한편으로는 마음 아프다.
곧 중학 3년이 될 지금은 녀석이 초등시절보다 가슴 아픔이 훨씬 덜하다.
점심 먹여 놓고 나가기도 시간이 빠듯해서 간식은 빵이나 과자 컵라면 등을 제 손으로 찾아 먹어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가 배 고파 할 적시에 무언가를 바로 만들어 따뜻이 먹일 수가 없었다.
엄마, 언제 와?
왜? 무슨 일 있니?
아니, 배 고파서...
그럼 빵하고 우유 먹으면 되잖아.
빵 질렸어. 그냥 컵라면 먹을래.
응, 그러든지. 아니다, 물 붓다가 데일라, 좀만 기다려라 엄마가 빨리 갈게.
배고프다는 전화를 받으면 가슴팍에 돌덩이가 얹힌다.
아들의 밥을 벌기 위해 아들을 배고프게 해야 하는 모순이 벗어날 길 없는 덫 같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일하다 말고 너 밥 차려 주러 가라고? 엄마가 날아서 갈까? 전화 저 편에 있는 엄마에게 어쩌라고? 해결책 없는 그런 전화 하지 마라, 나는 소리질렀다.
녀석이 가여워 가슴이 찢어지기 때문에 그리 말했다.
녀석의 "배 고파"라는 목소리를 듣고도 어찌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그리하였다.
그런 형편을 잘 알면서도 그냥 전화해 본 녀석의 마음이 훤히 보여서 그리하였다.
녀석이 5학년쯤 되자 스스로 라면을 끓여 먹고 학원엘 갔다고 했다.
가스불과 뜨거운 물이 불안했지만 대범한 엄마가 되기로 하였다.
조금씩 생존의 법칙을 체득한 녀석은 날로 진화했다.
엄마, 자장면 시켜먹어도 돼?
어...되는데, 너 혼자 시키고 돈주고 빈 그릇도 내어놓고 하겠니?
그럼, 엄마 하던 대로 하면 되겠지.
돌아와 보니 과연 자장면을 하나 배달시켜 잘 먹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는 종종 배달을 시켜 녀석이 허기를 달래곤 하였다.
한 그릇을 배달해 준 자장면집이 고마웠었다.
그래, 그러구러 어서 커라. 크면 다 해결될 일이다...
크면 크는 대로 또 다른 문제가 많다는 걸 몰랐다.
세상사에 눈이 밝아져서 원하는 것도 진화된다는 것.
엄마, 오늘은 조금 업그레이드 해서 탕슉 어때? 학원 갔다올 때 돼지국밥의 냄새가 코를 힘들게 하네. 퇴근할 때 닭갈비집에서 만나자. 엄마, 유부초밥 만들어 두고 나가. 엄마, 주말에 마트로 장보러 가자, 제발.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반찬투정 따윈 없다는 것, 피자 같은 정크 푸드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내가 음식 비스무리하게 만들어 놓으면 맛있게 먹는다.
엄마, 음식점 차려라 하는 걸 보니 미각발달이 잘 안 된 모양이다.
오늘 점심엔 칼국수를 먹일 참이다.
멸치 육수가 끓는 사이 커피를 타서 블로그 앞에 앉는다.
커피에 설탕을 넣고 두어 번 휘저었는데 맛이 닝닝하다.
단맛을 싫어하여 설탕을 더 넣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맛이 없다.
거의 다 마셔가는데 아래 설탕이 덜 녹았었나 보다.
조금 흔들어 마시니 그제야 제맛이 난다.
끄트머리 몇 모금은 맛있게 마셨다.
사는 것도 그랬으면 싶다.
미처 녹지 않았던 그 무엇이 후반부 내 인생엔 녹아들기를, 부족했던 그 무엇이 스며들어 맛있고 달콤한 내 인생으로 마감할 수 있기를.
무엇으로 휘저어야 더 맛있을까...사랑? 돈? 다이아먼드로 만들어진 찻숟가락?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