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내가 몇 살인가 의아해지는 순간이 있다.
아들이 옆에 있을 경우는 꼼짝없이 어른 마인드인데, 오늘처럼 하루종일 혼자 빈둥거리는 날에는 스무 살 즈음인 것 같다. 이럴 때는 되도록 거울을 피해 다니는 것이 상책이다.
어떤 순간엔 아들과 아이스크림 하나를 가지고도 양보 안 하고 아웅다웅한다. 녀석의 눈높이가 내 머리 위로 쑥 높아진 최근에는 가끔 나를 어이없다는 듯 내려다 보는 눈초리도 심심찮게 느끼는 중이다.
나이를 떠나 산다는 것, 참 좋지 않은가...서른 다섯을 넘어가면서 나는 나이를 놓아 버렸다. 굳이 나이을 계산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고 상대적 숫자의 비교 등도 부질없다고 느껴졌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정신연령이 자라지 않았을까, 내 연배의 여사님들보다는 파릇파릇한 츠자들과의 철딱서니없는 시시덕거림이 더 입맛에 맞고 의사소통도 잘 된다. 물론 나 혼자 생각일 뿐, 그들의 느낌도 그러한지는 모르고 싶다.
그 왜, 분위기라는 것이 있잖은가, 그것을 믿고 의지하기로 한다. 비록 내 얼굴에 잔주름이 몇 가닥 남들보다 많다 하더라도 젊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 젊은 것이고, 팽팽한 피부이긴 한데 말투, 걸음걸이, 어휘선택, 관심거리, 모든 것이 언니스러운, 각자가 내보이는 분위기 말이다. 내가 젊은 분위기라는 말이 아니라, 젊은 마음으로 나이를 버리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얼마 전 한 친구가, 내가 본 아지매들 중에서 니가 제일 퍼석하다 라고 알려 줘 버렸다. 물론 농담이길 바라지만 , 내가 놀란 이유는 내 퍼석함을 눈치채는 사람이 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퍼석하다는 것은 나 혼자 몰래 알고 있는 진실이고, 까다로와 보이는 인상으로 잘 위장을 하고 있기에 아무도 모를 줄 알았었다. 이쯤에서 나를 솔직히 말해보자. 개인적으로 퍼석한 면은 무언가,10가지만 대라면 참으로 곤란하다.
1. 슬픈 노래를 들으면 무조건 가슴이 찢어진다.
2. 아직 칼질을 잘 못하는 18년차 주부다.
나는 칼이 무섭다. 시퍼런 주방용 식칼은 사용하지 않는다. 조금 큰 과도를 쓴다. 무우, 수박, 못 썰 것 없다. 울언니는 혀를 끌끌 찬다.
무우채를 현란하게 썰어보는 게 소원이다.
3. 규칙적인 생활에 아예 관심을 안 둔다. 밤을 꼴가닥 새는 택도 없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4. 운동을 싫어한다. 가만히 앉아서 뭉개는 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5. 청소나 빨래를 문득 생각난 듯이 발작적으로 한다.
6. 맛있는 김치를 못 담는다. 노력도 없었지만 겸손하게 포기했다.
7. 몸에 득이 되는 음료수나 약은 되도록 멀리 한다. 이유는 맛이 없기 때문이다.
8. 먹는 것이 귀찮아 죽지 않을 만큼만 먹는다.
9. 대신 냉장고에 푸른 술병은 항상 대기시킨다. 며칠 잠을 설치면 억지로라도 자야 하니까.
10. 아직도 낭만 운운 하는 아지매다. 아아 이것이 결정적이다.
11. 경제동향, 시장경제, 실물경제, 다아 모른다. 손에 쥐어준다 해도 모르는 멍청이다. 아이큐 의심 받아도 마땅하다.
12. 전국민의 놀이문화 고스톱을 못 친다. 아무리 가르침을 받아도 모른다. 사교생활에 문제 많다.
13. 아파트 경비아자씨 외의 인사를 나누는 주민이 없다. 못됐다.
14. 건망증쯤은 이제 퍼석함에 낑가주지도 않는다.
15. 젓가락질이 어설픈 어른은 첨 봤다고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무지 챙피했다. 난 모르고 있었다.
16. 무서워서 귀 뚫는 것은 꿈에도 생각 안 한다.
17. 날씨에 기분을 많이 영향받는다.
18. 다가올 사랑을 여적지 꿈꾼다. 주제를 모르고 싶은 여자다.
밤새도 모자랄 판이니 그만 진정하기로 한다. 이 퍼석함을 들키다니, 분하다. 그렇다면 혹 내가 잘하는 것은 없을까. (오래 생각 쥐어짬) 있다.
1. 잘 운다. 생존경쟁에 전혀 도움도 안되는 정서만 발달해서다.
2. 옛날 하랄 때 안 한 공부가 요새 궁금하여, 밤 늦도록 각 과목 교육방송을 수험생처럼 잘 본다.
3. 커피를 아침 댓바람부터 마셔도 속도 안 아프다.
4. 성질 혹은 심술도 잘 부린다.
5. 하루종일 입 다물고 혼자서도 잘 논다.
...................
쓰다 보니 이것도 어째 퍼석함과 통한다. 이거야 원. 나는 암만해도 결국 나가 된다. '나'는 이 세상 유일무이한 존재이고 어떻게 손 볼 대상이 아니다. 퍼석하면 퍼석한 그대로, 사랑스러우면 사랑스러움 그대로 각자의 색채로 가는 것이 삶이다.
다만, 나쁜 것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멋진 것은 더욱 멋진 색깔로 다듬어 가는 것도 인생의 큰 숙제이고 기쁨이리라. 그러니 나 아닌 다른 것으로가 아니라 내가 가진 바로 그것을 가꾸어 가리라ㅡ하고 생각이야 들지만, 삐딱한 평소 내 성정이 이런 전형적인 모범답안을 수용할지 모를 일이다.
작은 칼을 단단히 잡고 생선을 요리해 보려는 순간, 친구가 술 마시자고 전화를 걸어왔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으짤 수 없다...칼을 다시 꽂아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