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혹은 기록

몇 가지.

愛야 2006. 5. 23. 11:14

2006.5.16.

 

약속 시간에 늦어 바람처럼 길을 가다가 잠시 선다.

늘 같은 장소에서 꽃과 화분을 파는 곳.

바빠도 오늘은 꼭 하나 사자.

 

꽃이 매달린 것이 좋을까?

그냥 푸른 것이 좋을까?

 

호야를 본다.

몇 해 전 죽인 경험이 있다.

두껍고 담백한 잎.

예민하지 않은 성정.

흰 가장자리가 어울리는 초록.

 

이번엔 너를 덜 들여다 보마.

물을 좀 쉬어가며 주마.

햇빛 쬐기를 잊지 않으마.

그러니 오래 살아 있어라.

 

세 번째 화분을 삼천 원 주고 산다. 두 번째 이후 6개월 만이다.

너무 늦었다.

화분을 사는 것은 적어도 나에겐 특별한 의미다.

돌봐 주어야 하는 존재.

몸도 마음도 여력이 없었던, 이 세상 만물이 다 귀찮고 성가시기만 했던 나.

그것을 조금씩 부수어가는 세 번째 훈련이다.

 

 

2006.5.18

 

5.18을 기해 房의 간판을 바꾼다.

 

<서정주가 그립다>라고 해서 특별히 그를 그리워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방제를 짓고 등록한 즉흥적인 30초쯤에 다른 블로거들이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 이유다.

 

서정주는 꼭 서정주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시심이었고 그건 누구나의 가슴 속에 다 존재한다.

일상에서 일순 스치듯 나를 깨우치는 정서, 잃지 말아야 하는 마음 그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참 어렵다.

 

그립다.

놓쳐 버린, 지금도 놓쳐 가고 있는 그것이 그립다.

 

나는 그의 초창기 시에 매혹되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의 '춘향유문'이나 '귀촉도'나 '자화상'을 어이 잊을 것인가.

 

하지만 아다시피 시를 벗어난 세계에서 그는 많은 사람을 잃었다.

5.18과 그 언저리에서 상처입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정치적 처신과 같이 받아들이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문학은 단지 문학으로만 판단하라고 요구하는 건 상처입지 않은 자들의 횡포일 수 있다.

 

얼마나 아플 것인가...

서정주란 이름만으로 화인처럼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상처 바깥에 선 나의 예의가 아니다.

의도도 바라는 바도 아니다. 

 

서정주는 김기림이어도 좋고, 정호승이어도, 강은교이어도, 김용택이어도 좋다.

그리워 해야 할 것은 이름이 아니다.

자고 나면 멀어지는 안타까운 꿈일 뿐.

 

2006.5.22.

 

비가 올 징조다.

무덥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

월요일부터 지친다.

겨울잠 자듯이 여름잠이 있다면 난 기필코 다시 곰이 되리라.

 

지인으로부터 너무나 기분 좋은 목소리가 날아 왔다.

걱정하던 일이 해결되었어요...

오오, 나도 그녀의 해방이 내 일처럼 반갑다.

 

또 다른 지인이 파라솔을 선물한다.

고맙다.

좋아하는 색을 몰라 그냥 샀어요.....

집에 와서 펼치니 가장자리 러플이 화려한 밝은 다홍색.

내 체질을 바꾸어야 소화할 스타일이다.

그래도 고맙다.

 

시작은 짜증스러웠지만 그 끝은 창대했던 하루.

곰이 될 소망을 아쉽지만 접는다.

다홍색 파라솔 쓰고 엉덩이 흔들며 그리운 이를 만나러 가는 여인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