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2006.5.16.
약속 시간에 늦어 바람처럼 길을 가다가 잠시 선다.
늘 같은 장소에서 꽃과 화분을 파는 곳.
바빠도 오늘은 꼭 하나 사자.
꽃이 매달린 것이 좋을까?
그냥 푸른 것이 좋을까?
호야를 본다.
몇 해 전 죽인 경험이 있다.
두껍고 담백한 잎.
예민하지 않은 성정.
흰 가장자리가 어울리는 초록.
이번엔 너를 덜 들여다 보마.
물을 좀 쉬어가며 주마.
햇빛 쬐기를 잊지 않으마.
그러니 오래 살아 있어라.
세 번째 화분을 삼천 원 주고 산다. 두 번째 이후 6개월 만이다.
너무 늦었다.
화분을 사는 것은 적어도 나에겐 특별한 의미다.
돌봐 주어야 하는 존재.
몸도 마음도 여력이 없었던, 이 세상 만물이 다 귀찮고 성가시기만 했던 나.
그것을 조금씩 부수어가는 세 번째 훈련이다.
2006.5.18
5.18을 기해 房의 간판을 바꾼다.
<서정주가 그립다>라고 해서 특별히 그를 그리워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방제를 짓고 등록한 즉흥적인 30초쯤에 다른 블로거들이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 이유다.
서정주는 꼭 서정주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시심이었고 그건 누구나의 가슴 속에 다 존재한다.
일상에서 일순 스치듯 나를 깨우치는 정서, 잃지 말아야 하는 마음 그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참 어렵다.
그립다.
놓쳐 버린, 지금도 놓쳐 가고 있는 그것이 그립다.
나는 그의 초창기 시에 매혹되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의 '춘향유문'이나 '귀촉도'나 '자화상'을 어이 잊을 것인가.
하지만 아다시피 시를 벗어난 세계에서 그는 많은 사람을 잃었다.
5.18과 그 언저리에서 상처입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정치적 처신과 같이 받아들이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문학은 단지 문학으로만 판단하라고 요구하는 건 상처입지 않은 자들의 횡포일 수 있다.
얼마나 아플 것인가...
서정주란 이름만으로 화인처럼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상처 바깥에 선 나의 예의가 아니다.
의도도 바라는 바도 아니다.
서정주는 김기림이어도 좋고, 정호승이어도, 강은교이어도, 김용택이어도 좋다.
그리워 해야 할 것은 이름이 아니다.
자고 나면 멀어지는 안타까운 꿈일 뿐.
2006.5.22.
비가 올 징조다.
무덥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
월요일부터 지친다.
겨울잠 자듯이 여름잠이 있다면 난 기필코 다시 곰이 되리라.
지인으로부터 너무나 기분 좋은 목소리가 날아 왔다.
걱정하던 일이 해결되었어요...
오오, 나도 그녀의 해방이 내 일처럼 반갑다.
또 다른 지인이 파라솔을 선물한다.
고맙다.
좋아하는 색을 몰라 그냥 샀어요.....
집에 와서 펼치니 가장자리 러플이 화려한 밝은 다홍색.
내 체질을 바꾸어야 소화할 스타일이다.
그래도 고맙다.
시작은 짜증스러웠지만 그 끝은 창대했던 하루.
곰이 될 소망을 아쉽지만 접는다.
다홍색 파라솔 쓰고 엉덩이 흔들며 그리운 이를 만나러 가는 여인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