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기

취한 손가락.

愛야 2007. 2. 14. 23:06

 

 

 

겨울이 다 갔다고 방심한 어제, 초저녁부터 비가 내렸어. 보슬거리는 봄비라면 말을 안 해. 한여름 폭풍처럼 비바람이 온 거리를 소란스럽게 만들었어. 젊은이들은 젖은 채 마구 달려가고 현수막들은 미친 듯 바람에 저항하였어. 빌린 우산 아래 겨우 몸을 감추고 돌아온 나의 오른발이 부츠 속에서 젖어 있었지. 5년쯤 신은 금강제화 부츠 오른쪽에 물이 살금살금 기어드는지 비로소 알았어.

 

오늘은 꽤 추웠어. 난 내복을 안 입어. 갑갑해서 멀미하느니 차라리 추위를 견디는 편이지. 오늘은 하필 두꺼운 팬티스타킹도 안 신었어. 청바지 아래 짧은 스타킹을 신었지. 말하자면 맨다리였단 말이지. 집에서 나온 한낮에 날씨 가늠이 잘 안 되었던 탓이야.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자 기온도 같이 내렸어. 믿느니 오직 온몸을 둘러싸고 있는 부드러운 지방층 뿐이었어. 비굴하게 무릎이 덜덜 떨렸어, 젠장 집으로 가는 버스는 좀체 오질 않았어.

 

뱃가죽이 등에 붙었지만 밥은 먹고 싶지 않았어. 추위에 언 마음을 녹여줄 보리차를 올려 놓고 냉장고를 열었더니 캔맥주가 한쪽 귀퉁이에 참하게 있었어. 포만감 대비 마취의 효과가 별로라 맥주는 썩 이뻐하지 않지만 어쩌겠어, 퐁 따서 콜콜 목으로 넘겼지.

 

얼어 있던 두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어. 추위에 얼었던 터라 상승효과가 컸을 거야. 손바닥으로 화끈거리는 양볼을 꼭 눌렀어.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울컥 솟지 뭐야. 볼을 누르는데 왜 치약처럼 눈물이 밀려 올라 왔는지 모르겠어. 중요한 건 눈물이 났다는 거야. 슬픔이 기억났다는 거지.

 

남 몰래 흘려야 하는 눈물을 나는 많이 가지고 있었어. 가슴에 굳은 살이 박히기 전인 처녀시절에도 베개를 눈물로 젖게 한 밤이 많았어. 제법 흐느끼기까지 했다니까? 물론 결혼을 하자 흐느낌을 넘어 통곡과 몸부림도 서슴지 않았지. 아줌마가 되는 순간 우는 자세도 달라진다는 걸 알았어. 내 운명에 온몸을 부딪히며 그로 인해 울게 된다는 거. 어설픈 울음이 아니라 심장이 녹는 눈물이라는 거 말이야.

 

울고 울고 또 울고 나니 어느날부터 드디어 울지 않게 되었어. 그래, 우는 사이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었다는 걸 인정할게. 인간사 모두 그렇고 그럼을 알아버렸다는 사실도 무시 못 해. 나 운명을 사는 게 아니고 나 운명을 살고 있음을 인정하자 눈물이 사라졌어. 그럼 평화를 얻었느냐고? 아니면 풍문으로만 듣던 행복이 혹시 찾아온 거냐고? 아니라니까. 다만 내가 뻔뻔해졌을 뿐이야.

 

사랑의 암담한 해법에 눈이 붓도록 울던 시절이 생각나. 울면서 밥을 하고 울면서 화장실엘 가곤 했지. 그때처럼 울어 보고 싶어. 단념과 포기가 주는 평화 아래 무릎 꿇고 싶어. 울고 싶어. 그러나 울어지지 않았어. 감정을 눈으로 모일수록 시선은 무겁고 하하 잔주름만 도드라졌어.

 

놀랍지 않어? 그런데 맥주 한 캔이 나를 胃大하게 울렸단 말이야. 추운 거리에서 외로웠던 탓이라 쳐도 좋아. 자, 이제 퍼지르고 울면 되는 거야. 封해 놓았던 슬픔을 끄집어 내는 거지. 건조해진 세포가 흐물흐물해지면 좋겠어. 꽁꽁 언 뺨과 빈 위장을 달래느라 맥주 아닌 보리차 한 컵을 훌훌 마셨다면 난 지금 편히 잠들어 있을 테지. 그리운 모든 것은 뒤통수를 치며 나타나나 봐. 울음 우는 여자에게 건배를.

 

 

  ** 살짝 취중이니 오타나 이상한 문구 신고해 주세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