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l Nidrei 듣는 밤
#1
따뜻한 가을날이 이어진다.
등에 땀 배는 가을은 짜증스럽다.
#2
늦게 장을 보았다.
마트에서 나와 집으로 가려면 교차로 건널목 두 개를 이어서 건너야 한다.
두 번째 건널목은 샛길이어서 폭이 좁다.
차나 사람들은 (차도 사실은 사람이다)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다니기도 한다.
밤 9시 35분, 오늘은 건널목에 선 사람이 나 혼자다.
초록불로 바뀌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느리게 건넌다.
고백하자면, 고의로 느리게 걸어 보았다.
신호대기 중인 차들은 내가 은근히 밉겠다.
하지만 차는 속상할 권리도 없고 속상해서도 안 된다.
초록불 시간은 어디까지나 보행자의 몫이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서다.
초록불이 남았는데도 다 건너버렸다.
나는 건너자마자 휙 뒤돌아 보았다.
차들이 어떻게 하나 보기 위해서.
운전자들은 내가 자신의 차 앞을 지나침과 동시에 출발했다.
신호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운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써글....
아무리 행인이 한 사람이였기로 쪼잔하게 보행자 신호를 잘라묵다니.
그걸 지키고 싶은 자.존.심.은 도대체 없는 거냐.
하지만 차 뒤통수를 째려보면 뭐하나, 쌔고 쌘 풍경인걸.
#3
밤 늦게 좋아하는 곡을 듣는다.
"콜 니드라이(Kol Nidrei)"는 장중할 뿐더러 그 의미로 볼 때 경건히 옷깃을 여며야 마땅한데
나는 드러누워 애니팡2를 하며 한 귀로 듣는다.
그러다가도 기다리는 대목이 나오면 손과 숨을 잠깐 멈춘다.
이 연주는 다른 연주와 달리 오케스트라 대신 피아노로만 첼로를 받혀준다.
몰아치는 오케스트라의 화음보다 담백하고 순결하다.
낮은 채도가 주는 쓸쓸함.
이 불운한 첼리스트도 그 사실을 알았을까
#4
제정신처럼 하루하루 잘 지내는 내가 한심하다.
[Kol Nidrei / Jacqueline du P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