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기

Kol Nidrei 듣는 밤

愛야 2015. 10. 21. 23:47

#1

따뜻한 가을날이 이어진다.

등에 땀 배는 가을은 짜증스럽다.

 

#2

늦게 장을 보았다.

마트에서 나와 집으로 가려면 교차로 건널목 두 개를 이어서 건너야 한다.

두 번째 건널목은 샛길이어서 폭이 좁다.

차나 사람들은 (차도 사실은 사람이다)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다니기도 한다.

밤 9시 35분, 오늘은 건널목에 선 사람이 나 혼자다.

 

초록불로 바뀌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느리게 건넌다.

고백하자면, 고의로 느리게 걸어 보았다.

신호대기 중인 차들은 내가 은근히 밉겠다.

하지만 차는 속상할 권리도 없고 속상해서도 안 된다.

초록불 시간은 어디까지나 보행자의 몫이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서다.

 

초록불이 남았는데도 다 건너버렸다.

나는 건너자마자 휙 뒤돌아 보았다.

차들이 어떻게 하나 보기 위해서.

운전자들은 내가 자신의 차 앞을 지나침과 동시에 출발했다.

신호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운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써글....

아무리 행인이 한 사람이였기로 쪼잔하게 보행자 신호를 잘라묵다니.

그걸 지키고 싶은 자.존.심.은 도대체 없는 거냐.

하지만 차 뒤통수를 째려보면 뭐하나, 쌔고 쌘 풍경인걸.

 

#3

밤 늦게 좋아하는 곡을 듣는다.

"콜 니드라이(Kol Nidrei)"는 장중할 뿐더러 그 의미로 볼 때 경건히 옷깃을 여며야 마땅한데

나는 드러누워 애니팡2를 하며 한 귀로 듣는다.

그러다가도 기다리는 대목이 나오면 손과 숨을 잠깐 멈춘다.

 

이 연주는 다른 연주와 달리 오케스트라 대신 피아노로만 첼로를 받혀준다.

몰아치는 오케스트라의 화음보다 담백하고 순결하다.

낮은 채도가 주는 쓸쓸함.

이 불운한 첼리스트도 그 사실을 알았을까

 

#4

제정신처럼 하루하루 잘 지내는 내가 한심하다. 

 

[Kol Nidrei / Jacqueline du P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