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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낡은 영화의 주제곡

by 愛야 2011. 8. 4.

 

 

T.V. 화면에서는 막 한 사람이 몸을 날려 절벽의 중간쯤을 낙하하는 중이었다.

절벽 아래는 망망한 바다였다.

남자는 바다를 향하여 하염없이 떨어져 갔다.

채널을 아무렇게나 돌리고 왔다갔다하던 나는 멈칫 섰다.

저절로 마음속에서 외쳐졌다.

아, 빠삐용이다!

 

절벽 위에 홀로 남은 드가.

젊은 더스틴 홉먼은 두꺼운 안경 너머로 사라져 가는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울었던가.

갸우뚱한 고개와 쓸쓸한 표정.

단념처럼 돌아서 가는 그의 모습이 고독하였다.

빠삐용이 몸을 맡긴 파도 닮은 음악이 흘러 나왔다.

적당히 애수적이고 적당히 빠른 리듬으로, 너무 슬프지 않아서 오히려 슬픈 음악.

그리고 화면은 끝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맨 마지막 장면을 1분가량 보았다.

수십 년이 지난 영화지만 명배우들의 연기에는 여전히 가슴 떨리는 여운이 있었다. 

드가의 마지막 얼굴, 어눌하고 모자란 듯한 얼굴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앙리의 탈출 이후 그는 어떻게 혼자 견디었을까.

떠난 자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해도 남는 자는 언제나 외로운 법이다.

그 짧은 시간에 나는 혹시 그가 주연배우 아니었던가 의심하였다.

 

옛날엔 스티브 맥퀸의 포스와 용기만이 벅찬 매력이었다. 

권력과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무언가를 해내고 말 것이란 기대감으로 그를 보았으며, 그는 늘 기대를 충족시켰다.

그게 주인공의 법칙이었다.

드가란 인물에게는 답답함과 짜증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살다보니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란 기실 한없이 소심하고 비겁하고 여린 존재이지 않던가.

나는 살면서 그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앙리보다는 드가가 더 우리의 모습에 근접한다는 것.

슬프지만 정직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스티브 맥퀸의 연기인생은 빠삐용을 남긴 것으로 충분하다 하여도 지나침이 없다.

<빠삐용>은 탈출의 대명사가 되어 캐릭터의 한 전형을 만들었다.

오랫동안 인용되어 온 명대사들은 또 어떤가.

 

그런데, 나는 저 빠른 템포의 곡이 왜 찔끔 눈물겨운지 모르겠다.

향수, 추억, 그딴 것만은 분명 아닌데.

"인생을 낭비한 죄"가 앙리뿐 아니라 나에게도 진행되고 있는지 잠시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르겠다.

모르고 싶다.

그저 야자열매 가마니를 타고 떠나는 앙리의 외침처럼 I'm still here.

 

 

 

 

 

 

Free As The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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