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케치145

지나가는 길 동네 아파트 화단에 분홍 꽃나무 하나가 눈을 끌었다. 복숭아꽃도 아니고 살구꽃도 아니고 벚꽃은 더더욱 아니었다. 검색으로 기어코 알아낸 정체는 서부해당화. 수형이 품위가 있어 정원수로 적합하며 4-5월에 꽃이 핀다고 했다. 거기까지, 원산지가 어떠니 하는 백과사전식 깊은 지식은 필요없다. 꽃망울이 조롱조롱 많지만 지저분하지 않았다. 활짝 핀 송이를 제외하곤 대부분 아래를 향해 있어 얼굴 보기 힘들었다. 작은 바람에도 꽃망울들이 흔들리며 깨방정을 떤다. 달콤한 향내가 동네방네 퍼져서 끊임없이 벌들이 윙윙거린다. 사진 몇 방 누르는 그 순간에도 왕벌이 온몸을 던져 내 손등에 부딪히며 날아들었다. 나는 귀엽고 작은꽃이 좋다. 가만히 보고있으면 슬그머니 미소가 배어나오는. 2023. 3. 31.
투정 소문대로 봄은 거리에 이미 가득하였다.낡은 난간 틈으로 기를 쓰고 들이미는 치명적 노랑이 그것을 증명하였다.벚꽃도 환하게 피었거나 피고 있는 중이었다.  온 세상은 머잖아 꽃으로 덮일 듯한데, 베란다 내 꽃기린은 느리기만 하다.얼마 전 웃자란 줄기를 잘라 키를 낮춘 것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다.그나마 분홍꽃은 몇 송이 피었으나 빨간 꽃은 오래 침묵 중이다.잎도 새로 내놓지 않고 있다.하지만 너그러운 나는, 꽃기린이 죽지만 않는다면 곧 흙갈이를 해 줄 계획이다.그러면 저도 꽃을 피우지 않고 견딜 재간이 없을 터. 누군가의 호야는 해마다 귀여운 꽃을 조롱조롱 피운다는데 나는 여즉 호야꽃을 보지 못했다.화분을 가지기 시작한 이래 호야를 키우지 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민망할 따름이다.식물들은 늘 나에게 인색하다.. 2023. 3. 22.
겨울 콜링 ※ 혹시 "이 동영상은 볼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유튜브 화면에 뜨면, 컴퓨터 왼쪽위에서 새로고침 하거나 ← (이전 페이지)을 클릭했다가 다시 돌아오면 로딩되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고, 아마 로딩을 위한 준비체조가 필요한 듯. 내 마음에는 겨울 콜링으로 들린다. 도입에서 오 달링을 높은 톤으로 일단 외치고 보는 연역적 가사. 찌질하지만 간절한 가사와 가수의 음색은 더할 수 없이 잘 맞아떨어진다. 어떻게 이 노래를 귀여운 봄, 다이내믹 여름, 알록달록 가을에 부를 것인가. 외롭고 삭막해서 추억밖에 꺼낼 게 없는 겨울이 딱이지. 그런데, 어느 날 그 가수를 T.V에서 본 나는 뜨악!!! 했다. 군더더기 없고 순정한 목소리를 먼저 들은 탓일까, 가수는 예상 못했던 oily한 모습이었다.(죄송함다) 외모가.. 2022. 10. 27.
노란 봄 황사가 바다를 증발시켰다.파랗게 반짝거려야 할 배경은 하얗게 날아갔고, 유채꽃만 풍경 속에서 살아남았다.그런데 유채밭에는 왜 항상 거름냄새가 옵션일까.어느 해 봄, 평화공원 귀퉁이에 손바닥만 한 유채밭이 처음 생겼을 때도 그랬다.유채꽃이 필 무렵에 자연친화적 퇴비를 줘라, 이런 공원관리 메뉴얼이라도 있을까.그러거나 말거나 봄은 꿋꿋하게 펄럭이며 전진한다.                                           ※ 덧붙임: 황사가 걷힌 며칠 후 같은 장소. 2021. 4. 19.
들킴 오랜만에 따뜻하고 비도 그쳤습니다. 카메라를 챙겨 오후에 공원으로 갔습니다. 3월 들어 내내 바람 불고 춥고를 반복했건만 기특하게 목련이 피어나고 오래된 분홍동백도 그자리에서 여전합니다. 늙어서 그런지 조금 누추해졌군요. 공원에는 삼삼오오 노인들이 가득합니다. 한낮에 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래엔 더 할 것입니다. 열에 아홉은 어두운 패딩 재킷을 입었습니다. 컴컴한 그들의 무리가 너무 암담해 보여 홱 눈길을 돌렸습니다. 돌아오는 길 아파트 입구에서 젊은 부부와 세 살쯤의 꼬맹이 둘이 막 차에서 내립니다. 아이들은 혹시 내가 못 들을세라 목청 높혀 뒷통수에 대고 인사합니다. 함머니 안녕하세요오! 엄마가 황급히 아가들을 제지합니다. 야야, 우리 할머니 아니야~. 나는 무심하게 응, 그래, 안녕? 대답하며.. 2021. 3. 5.
비가 와도 좋다 #1.내 배꼽시계는 오전 11시 무렵 작동한다.아침 6시 기상한 날과 8시에 기상한 날과 10시에 기상한 날이 다르지 않았다.정신이 깨어난 시간과 몸이 깨어나는 시간이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6시 일어난 날은 5시간쯤 기다리면 되고, 8시 일어난 날은 3시간쯤 빈둥거리면 되었다.몇 시에 깨든 배고픈 시간은 오전 11시 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던 날, 아침밥의 강박을 내려놓았다.그래서 하루 두 끼, 오래된 습관이 되었다.  #2일정하게 반복되는 소리가 끈질기게 잠 속까지 찾아왔다.소리를 피해 비몽사몽 도망다니다가 지쳐 눈을 떠서 시간을 보니, 너무 이른 아침이다.밖에 요란한 비가 내리는 중이었다.세찬 비는 밤새 유리창을 두드리고, 위층 베란다에서 떨어지는 빗줄기가 내 집 난간으로 떨어졌다.일정한 낙숫물 소리.. 2020. 6. 21.
연못 물속으로 내려앉은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계절이 느껴진다. 잦은 비와 바람이 지겹더니 연못에서 툭 가을이다. 하루 사이 두툼한 긴소매 티셔츠를 입고 밤산책을 간다. 내일모레는 당연한 얼굴로 롱패딩을 꺼내 툭툭 털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이너무 지구별. 계절이 건너가는 순간은 언제나 갑자기. 2019. 10. 8.
동네 어귀 #1. 여름꽃 자목련이다. 지난봄의 꽃 사진을 우려먹는 게 아니다. 불과 열흘 전쯤 사진이다. 쟈가 무슨 이유로 이모작을 결심하였는지 모르지만, 이 염천에 쓸데없는 반항이다. 목련은 꽃 먼저 피고 잎이 나는데 지금은 여름이라 잎이 무성한 가운데 꽃이 있다. 촌핑크에 렌즈를 가져간 순.. 2019. 8. 30.
잃은 것의 무게 꽃들이 각자의 색으로 정신없이 핀다. 프렌치 라벤더, 샤스타 데이지, 함박꽃 같은 장미, 나무도 그늘을 넓히며 짙어간다. 여름으로 가는 봄. 작년에 바이러스 감염되어 내다버린 사진파일이 가끔 아깝고 아쉽다. 내가 성급했나 후회도 된다. 컴퓨터 병원에 가 볼 걸, 무슨 방책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수준 있는 사진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내가 꺼내보는 용도일 뿐. 우연히 옛날 포스팅에서 발견한 사진. 2009년 가을, 혼자 경주 불국사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경주월드를 지나며 하늘을 문득 보니 나를 따라오던 열기구. 흔들리는 시내버스에 지친 영혼으로 앉았던 나는 그 와중에 사진을 찍었다. 이제 원본은 사라지고 저 작은 흑백처리된 것이 남았다. 사진은 추억으로 건너가는 실마리임이 분명한데,.. 2019. 5.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