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야채칸에서 콩나물 봉지를 꺼낸다. 엊그제 북엇국 끓일 때 필요한 만큼 딱 한 줌 사용한 후 넣어 둔 것이니 며칠 묵었다. 아니나 다를까 콩나물이 가늘어지고 물이 생겼다. 귀차니즘의 댓가가 낭비로 돌아왔다.
나는 콩나물 반찬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콩나물 손질은 너무 싫다. 덥석 장바구니에 담아 와선 그대로 방치하였다가 버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좋아하면 손질도 홍홍 콧노래 부르면서 해야 할 텐데 앞뒤가 안 맞다. 더구나 마트용 콩나물은 콩 껍질도 없어서 손질이 편한데 말이다. 먹을 때의 콩나물과 다듬을 때의 콩나물에 대한 내 자세가 다른 모양이다. 표리부동하긴...
명절이나 제삿날, 언니와 나의 으뜸 과제는 콩나물 다듬기였다. 엄마는 산더미 같은 콩나물 소쿠리를 우리 앞에 놓아 주었다. 어린 내 눈에 그 콩나물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저 콩나물을 언제 다 다듬을 것인지, 과연 일이 끝나기나 할지 기가 콱 막히고 기운부터 빠졌다. 제사 음식을 맡길 만큼 언니가 자라지 않았으니 시킬 일이란 나물거리 다듬기였을 것이다. 막내인 나는 부록이었다. 즉, 언니는 일하는데 너만 만화책 보게 둘 수 없다는 엄마의 형평성이랄까.
어린 나는 콩나물 두어 가닥을 쥐고 뿌리 따고 콩깍지를 골라냈다. 일손 빠른 사람이 보면 간이 휘까닥 뒤집힐 노릇이었으나, <다듬는> 나로선 내 방법이 옳았다. 무엇보다 내 딴엔 빛의 속도로 일을 해치우는 중이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무시무시한 콩나물 소쿠리도 바닥이 나고, 우린 제사를 지낸 후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나물 비빔밥을 먹을 땐 그것이 내가 다듬은 그 콩나물이라는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맛있기만 했다. 비빔밥엔 콩나물이 절대적이었다.
세월이 흘러 같이 콩나물 다듬던 언니가 시집을 가고, 엄마 곁엔 나 혼자 남았다. 어느 날, 바보상자가 눈이 번쩍할 소식을 전해 주었다. 콩나물 뿌리에 아스파라긴산이라는 이로운 물질이 많으니 되도록 뿌리 떼지 말고 그냥 드세요. 아아, 복음 같은 뉘우스! 과학자들의 연구는 게으른 백성 편이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콩나물의 압박에서 놓여나던 감격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면죄부가 아니겠나,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부여받는 떳떳함이라니. 엄마엄마, 콩나물 뿌리에 좋은 물질이 그렇게 많다네? 그렇다더라. 그럼 이제 콩나물 뿌리 따면 안 되겠따아. 야야, 보통 반찬 할 때나 그리하고 제사 명절 음식엔 지저분해서 몬 쓴다, 얼릉 다듬으. 아뉘, 명절엔 숙취 해소에 좋은 아스파라긴산이 더 절실할 텐데, 쩝.
얼마 전, 해물찜 음식점에 갔었다. 분주한 점심시간이 살풋 지난 오후였다. 주방 아줌마 두 분이 콩나물 소쿠리를 마주 들고 마당 수돗가로 나왔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많은 양이었는데 그걸 저녁 장사에 다 소진하는 모양이었다. 저걸 언제 다듬어? 내 수준으로 생각한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대고 보고 있었다. 그녀들은 콩나물을 한 움큼 쥐더니 가지런히 하기 위해 두어 번 툭툭 쳤다. 그리고 가.위.로 밑을 싹 잘랐다. 헉, 그래, 가위가 있었구나. 손 빠른 그녀들은 우리가 점심을 먹고 일어나기도 전에 모든 일을 해치우고 호스로 콩나물을 씻기 시작했다.
그 미끈거리던 감촉. 콩 비린내. 암담함.... 명절이면 아직도 떠오르는 걸 보면 어린 내가 치렀던 극기훈련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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