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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들킨 세월

by 愛야 2013. 6. 28.

 

 

"주민등록증이 부서졌어요, 새로 발급받으려구요."

"신분증 주시구요, 사진도 가지고 오셨어요?"

"네, 여기."

이번엔 당당히 사진을 건넨다.

얼마 전 똑같은 대사를 말한 후 사진을 착 건네려는 순간, 아무리 찾아도 사진이 없었다.

분명 집에서 출발 전 사진의 흰 테두리 부분을 오려 지갑의 동전 포켓에 넣었었다.

넣으면서 동전에 쓸려 구겨지려나 걱정까지 잠시 했었는데 동사무소 오는 사이 사진이 사라진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마술이지 않은가.

"아아, 사진이 없어져서... 다음에 다시 와야겠어요."

 

그 다음이 바로 오늘이었던 것이다.

창구의 여자가 사진 한 번 보고 내 얼굴 한 번 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이다.

뭐야, 그 거만한 표정은!

민원인을 고따우로 뒤로 제쳐서 바라보다니.

"사진이 너무 오래되었네요."

"어...그리 오래된 건 아닌데요."

"6개월 이내 찍은 사진이라야 합니다."

"6개월이야 넘었어요. 주부들이 6개월마다 찍을 일이 뭐 있겠어요. 집에 있던 사진 쓰려고 하니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럼 담당자에게 물어 보구요. 이리로 오세요"

그럼 넌 담당자 아니셨어요? 처음부터 담당자한테 보내지 왜 그러셨어요?

담당자는 젊은 여자였다.

담당자 아닌 여자가 담당자 여자에게 내 사진을 넘겨주며 설명한다.

담당자와 담당자 아닌 여자 둘이 동시에 나를 본다.

나는 최대한 젊은 표정을 지으며 '내가 바로 그 사람임과 오래지 않은 사진임'을 증명하려고 한다.

담당자는 사진 인화지를 만지며

"이 사진 아주 오랜 거네요, 요즘은 이런 용지를 안 써요."

담당자는 이유도 전문가답다.

"언제 찍은 거지요?" 했다.

참 집요하시긴.

족히 6년 이상 지났음을 어찌 내 입으로 말하라고.

"한 3-4년 되었을 겁니다만."

"더 오래된 것 같은데..."

"주민등록증이란 게 한 번 붙인 사진으로 오래가잖아요. 재발급받지 않고 그대로 간다면 어차피 옛 사진 되긴 매한가진데, 부탁해요." 

다행히 착한 담당자는 접수를 해 주었다.

앞으로 착실히 할매의 길을 걸을 뿐, 국가에 누를 끼칠 인재가 아니란 점을 알아챈 것이다.

지문을 찍고 임시 주민등록증도 받은 후 나는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사진보다 그리 늙어 버렸구나.

그러자 젊은 담당자가 상냥하게 변명해 준다.

"그래서가 아니구요, 사진 용지가 아주 옛날 것이어서... 2주 후 찾으러 오세요."

 

숙제 한 가지를 마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사진 용지가 아니라 내 얼굴의 변천으로 옛날 사진임을 단박 알았겠지만 그게 대수겠나.

얼굴이 무기이듯이 얼굴이 정답인걸.

얼른 가서 늦은 점심을 먹어야겠다.

이번 열무김치 너무 짜게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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