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천천히 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먼저 점심부터 묵자.
시장의 진수를 맛보기 위해 국숫집으로 들어가 앉는다.
유명세를 탄 가게인지, 사람들로 꽉 찼다.
무엇보다 시끄럽다.
非경상도 피플이라면 벼락 맞는 기분일 것이다.
하필 오픈 설거지대 앞의 좌석이라 설거지 소리가 자갈돌 구르는 소리처럼 왈그락덜그럭, 얼이 쑥 빠진다.
그 소음을 뚫고 아지매들이 주문받고 음식 나르고 계산을 외치고, 손님들은 또 그 소음을 뚫으며 대화까지 나누는, 악순환의 최절정이었다.
그렇게 시끄러운 음식점은 이 나이 먹도록 처음이다.
나오고 싶었지만 아지매가 바람처럼 주문을 받아간 상태였다.
점심시간 대여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누군들 밥때 밥 먹으러 가지 새벽이나 오밤중에 갈까?
혼비백산 국수를 먹고 나오니 뭔 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쥔이 노린 게 혹시 이것...?
그녀는 깡통시장과 국제시장을 좋아한다.
재미있어 죽을라 한다.
겨울에는 단팥죽 리어카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데 오늘은 배가 불러 통과한다.
그녀는 천 원짜리 스타킹을 사겠다더니 포부와 다르게 잠옷 겸 실내복, 즉 멀티복을 건진다.
아래위 쫘악 한 벌에 거금 일만 원.
별 필요하지도 않은 나에게도 한 벌 쾌척한다.
가시나, 재벌 코스프레는....


검정 비닐봉지를 흔들며 시장골목 3단을 다 돌자 남산 같던 배가 낮아지며 커피가 고프다.
길 건너 보수동 책방거리의 한 북카페로 들어간다.
문을 열자, 헌 책과 LP판의 묵은 냄새가 커피 향과 어울려 떠다니고 있었다.
책은 헌 책이지만 커피머신은 최신처럼 보여 안도한다.
선반에 비닐로 잘 싸인 귀한 <文學思想> 창간호가 보인다.
李 箱의 시니컬한 얼굴이 첫 표지를 장식했었다.
친구는 커피라떼, 나는 아메리카노, 커피를 앞에 두자 드디어 본격적 이바구 태세에 들어간다.
어떤 말이라도 들어주고,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우리가 원하는 건 다만 그것이다.
잠시 후, 적어도 70은 되어 보이는 고운 한 노인이 들어와 북카페 매니저에게 다가가 말한다.
요지는 "나에게 <現代文學>지 수십 권과 책이 많은데 아까워 버릴 수가 없으니 맡아줄 수 있느냐"이다.
자신은 국문학과 출신이라 젊은 시절 한 권씩 모은 것이며, 다른 책도 많다고 했다.
친구와 나는 대화를 잠시 멈추고 그 말을 엿듣는다.
매니저는 헌 문학지의 수요가 없다며 할머니를 완곡히 거절한다.
친구와 나는 씁쓸하게 귀를 거둔다.
무연히 돌아서 나가는 할머니 모습에서 우리 신세를 잠깐 본다.
할머니, 그 심정 잘 알아요.
수십 권 아닌 수백 권의 <現代文學>지를 포대에 넣어 내버린 사람이랍니다.
숭고한 의식처럼 매달 문학지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던 결과,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세월들.
포댓자루에 넣어 집 앞에 내다 놓았더니, 순식간에 사라졌습디다.
매달 첫 장을 들추던 순간의 그 황홀도 사라졌지요.
나이 드니 그것들은 구실 잃은 지나간 달력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어요.
저 선반의 <文學思想>처럼 창간호 아닌 2호부턴 무가치한 월간지를 누가 본다고 그걸 물어보러 힘들게 오셨어요.
국문학도였던 할머니, 이젠 그냥 버리세요.
내가 손을 털었다면, 털어야 한다면, 헌책방에 있든 고물상 저울 위에 있든 매한가지입니다.
세상에 넘쳐나는 게 지식과 지성이거든요.
공감되지는 않는다.
나무는 나무대로, 풀은 풀대로, 꽃은 꽃대로다.
나는 부드럽고 연약한 것이 억세고 강한 것을 이기는 경우를 많이 못 보았다.
더욱이, 나무나 풀이 억세고 강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차라리, 꽃을 더 사랑하므로 꽃을 그린다고 해다오.
그러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을 텐데.
아니다.
이젠 세상을 향해 트집 잡기 싫다.
꽃 그림 전시를 하는 작가에게 사과한다.
뜻대로 사세요, 남을 해하는 일만 아니라면.
커피 리필을 한 번 한 후 헤어지기 위해 엉덩이를 뗀다.
그 헌책방에 머무는 동안 둘 다 아무 책도 들춰보지 않는다.
이유는 돋보기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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