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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혹은 기록

정리

by 愛야 2006. 5. 21.

가끔은 나를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싶을 때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타인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치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다. 타인이 어떻게 여기든 무슨 상관이냐고, 그 나이에도 그런 유치한 궁금함을 가지냐고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대범하고 뚜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리 성숙된 인격이 아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지극히 평범한 사회적 존재이다 보니, 타인이 어찌 타인이기만 하겠는가. 그것은 나를 재는 척도이다. 타인의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함은 당연하다. 문제는 남이 나를 알기 앞서 나는 나를 어떤 인간으로 알고 있나,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엔 뾰족하게 내 색깔을 내 보였었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확고한 태도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살면서 점점 내 색깔을 잃어 간다고나 할까, 좋게 말하면 원만해지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몰개성이다. 내 생각은 후자에 가깝다.

 

여러 인생과 만나는 게 삶이다 보니 점점 내 것이 희석되어 이것도 그럴 듯, 저것도 그럴 듯하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 이해되지 않는게 없었다. 다 그럴 만하다고 이해되었다. 물론 이해한다고 다 찬성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이건 줏대가 혹시 소멸된 건 아닐가 싶을 때도 있을 지경이다. 그렇다면 남의 눈에 비친 나도 그럴까.

 

오랜 친구는 "옛날보다 덜 날카롭고 훨씬 부드럽다"고 한다. 이는 중력의 법칙을 증명하는 중인 여러 안면근육들과 늘어난 체중 탓이라 하자. 또는 굵고 낮아지는 목소리라든지 그 동안 익힌 접대성 멘트 탓이라 하자. 쌀쌀맞던 눈꼬리의 힘이 풀어지는 중이라도 좋다.

 

그런 물리적 사실보다 나는 솔직히 내부적으로 어떤 경계를 잃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싫음과 좋음, 미움과 사랑함, 찬성과 거부, 이쪽과 저쪽의 의사를 어느 한 쪽으로 확실히 전달하지 못하고 있음이다. 분명한 의향이 있으나  내색하지 않는 사교적 태도라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애초에 딱 잘라 판가름내지 않고 여러 개연성을 인정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두리뭉실이 몸매뿐 아니라 사고에도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직장의 동료는 정반대로, 나에게 날카롭고 단호한 판단과 태도가 있다고 말하니, 아마 나의 느낌이란 업무와 관련된 공적인 태도가 아니라 개인적인 정서에 국한된 현상인 모양이다. 하긴 일을 흐릿하게 해서야 밥 먹고 살 수 있겠나.

 

이쯤에서, 완전히 경계가 허물어져 흐리멍텅해지기 전에 나를 정비해 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뭘 좋아하나?  나는 뭘 싫어하나? 나는 뭐에 미치나? 나는 뭘 원하나?

너무 광범위하다. 쪼잔하게 쪼개자.

 

나는 산보다 바다를 사랑한다. 너무 많이 사랑하여 바라보기만 한다.

나는 말이 없어도 로맨틱한 사람을 좋아한다. 로맨틱한 신사는 더 좋아한다.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사랑한다. 영혼이 닿아있는 사랑을 사랑한다.

나는 밤을 낮보다 좋아한다.

나는 신나는 노래보다 슬픈 노래를 좋아하고 즐거운 영화보다 진지한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갈색을 가장 좋아한다. 요즘 검정 회색같은 무채색과 온갖 색들이 다 좋아지려고 해 걱정이다. 

나는 장미와 카라와 아이리스를 좋아하고 작고 애잔한 꽃을 사랑한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고 술을, 아니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나는 노래하기보다 노래듣기를 좋아하고, 옛날에는 춤추기도 좋아했다.

나는 책과, 책 속의 사람들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나는 찬 음식보다 따뜻한 음식을 좋아한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을 두고 아들과 다투기도 한다.

나는 자장면보다 칼국수를 좋아하며 피자를 먹느니 굶는 걸 좋아한다.

나는 사치함을 좋아하나 청바지도 좋아하며, 사치스런 청바지도 좋아하며, 큰 가방을 좋아하고 그 가방을 메고 하는 여행을 좋아한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알기보다 오랜 사람을 좋아한다.

나는 남을 불편하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불편한 걸 좋아한다..... 정말 영양가 없는 성격이다.

 

나는 떠들썩한 사람을 싫어하고 정치인을 싫어한다.

나는 계모임을 싫어한다.

나는 자랑이 많은 사람을 싫어한다. 하늘 아래 사람으로 사는 한 자랑할 것은 없다.

나는 자신의 부족함을 들키지 않으려 사돈의 팔촌 이름과 지위를 동원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나는 어설픈 코미디를 싫어하고 늘어지는 늘 같은 드라마를 싫어한다.

나는 여름의 습도 높은 더위를 싫어한다.

나는 형광빛을 띠는 색을 싫어한다.

나는 은목걸이를 제외한 장신구를 이젠 싫어한다.

나는 순대와 보신탕과 곱창과 건강음료를 싫어한다. 밥도 요즘 싫어한다. 먹는 것이 귀찮다.

나는 단 음식을 싫어하고 그보다 신 음식을 더 싫어한다.

나는 공중도덕심 없는 태도를 싫어한다.

나는 자제력 없는 사람을 싫어한다.

나는 자신의 사랑을 쉽게 포기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싫어하는 건 주로 사람의 타입이네)

나는 크고 짙은 꽃을 끔찍히 싫어한다.

나는 벌레와 곤충을 싫어한다.

 

나는 글을 잘 쓰고 싶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나는 석달 열흘을 집구석에서 가만히 엎드려 있고 싶다.

나는 아무 말 안 하고 지내고 싶다.

나는 아들이 성년이 된 후 세상을 바람처럼 떠돌고 싶다.

 

바람이 되어 떠나며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꿈꾼다.

.... 노루꼬리만큼 남은 엄마의 인생을 내 개인적 용도로 쓰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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