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날

우연히 만난 고흐

by 愛야 2007. 5. 27.

커피를 마시고 싶었으나 오전 내내 참고 있었다. 커피에 넣을 커피크 림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커피와 커피 크림은 왜 맨날 서로 엇박자로 떨어지는지 모르겠다. 슈퍼에 다녀 오면 좋겠지만 귀찮이즘이 커피에의 욕구보다 승하였기에 우선 참아 보았다.

 

마침 원두 티백이 있어 한 잔 마셨다. 무언가 성에 차지 않았다. 하루 종일 커피를 많이 마신 날 밤에는 연하고 깨끗한 원두가 좋다. 하지만 아침엔 양촌리 스타일의 달콤하고 진한 카페인이 신경세포를 건드려 줘야 행복한데 말이다, 꼴깍.

 

에잇, 더 참지 말자. 창밖에는 햇살이 쨍쨍하다. 파라솔을 찾았다. 없다! 어제 분명 사용하였는데 밤새 오데로 갔지비? 어제의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은행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서 나오니 내 뒤에 섰던 여자가 나를 불렀다. 이 파라솔 아줌마 꺼 아입니꺼? 아 예 고맙...그래서 잃어버릴 뻔한 파라솔을 찾았으니 은행은 아니고...맞다. 집 근처 슈퍼에 들렀지. 지금 내가 커피크림 사러 가려는 슈퍼 말이다. 어제 우유하고 소주를 사고 카운터에 파라솔을 턱 얹어두고 왔나벼. 그러니까 어제 은행이며 슈퍼며 가는 곳마다 파라솔을 두고 왔다는 것이다. 긴긴 여름, 정신 없는 나와 파라솔과의 숨바꼭질이 미루어 짐작되는 바이다. 이 여름을 어찌 버티려나....

 

과연 슈퍼 총각이 웃으며 파라솔을 내 준다. 헹, 내 추리가 맞았다니까. 여러 번의 실종 위기를 넘기고 내 손에 무사히 돌아온 파라솔이 대견하다. 커피크림을 사고 커피와 함께 먹을 크래커도 한 통 샀다.

 

크래커 봉지를 뜯으려다 손을 멈추었다. 한 통 안에 두 봉지가 들었는데 봉지의 겉에 프린트 된 것은 명화가 아닌가. 아니 이런 고급이 있나...전에는 무심코 보았는지 인지하지 못 했던 일이다. 하찮은 비스켓 봉지지만 뜻없는 무늬나 조잡한 색지보다 이왕이면 멋진 그림을 넣으니 얼마나 좋은가.  

 

 

 

왼쪽은 고흐의 <낮잠>(1890), 오른쪽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1857)이다. 고흐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이다. 왼쪽 농부의 아내는 낮잠을 자도 남푠의 날개 죽지에 팍 엎어져서 잔다. 고단해 보이지 않고 행복해 보인다. 건초더미의 색감도 달콤하다. 1890년이면 아를르에서 그가 자신을 죽인 해이다. 밀레의 오른쪽 그림은 학교 다닌 사람이면 다 알 것이다.

 

비스켓 봉지마다 다 다른 그림일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확인하려면 돈이 꽤 들어야 한다. 목말랐던 커피를 머그잔 가득 만들어 앞에 놓고 예쁜 비스켓 한 봉지를 뜯으니 마음이 다 푸근하다. 참 사람 마음이란 가벼워서 요런 하찮은 일에서도 위안을 느낀다. 하나는 아들을 위해 남겨 둔다. 어느 쪽을 먼저?

 

'그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러지 마라...  (0) 2007.06.16
유골 위로 달리다.  (0) 2007.06.12
HAPPY birthday to Buddha !  (0) 2007.05.21
선물 그리고 눈물.  (0) 2007.05.11
밤이 무서버.  (0) 2007.05.0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