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숨쉬기

버스가 머문 순간

by 愛야 2007. 9. 14.

버스 창 너머로 어느 건물 앞 계단에 앉아 있는 그녀가 보였다.

혹은 그인지도 모른다.

엉키고 더러워진 긴 머리와 여름 내내 거을린 검은 피부는 생물학적 성별을 모호하게 했다.

상관없다.

남녀를 초월하는, 광인일 뿐이다.  

내 눈엔 그녀로 보인다.

그녀는 오른손을 내밀며 누군가를 진지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서 설득당하고 있는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다.

그녀의 눈에만 보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아니 보이는 누군가와 의견 충돌이라도 있는지 그녀는 자못 심각하다.  

출발하는 버스가 그녀를 뒤로 떨구어 낸다.

그 순간 내 심장 근처에서 눈물이 만져졌다.

그녀는 무슨 비법으로 광인의 길로 갔을까, 그토록 나에겐 어렵던 길을. 
 
죽을 자신은 있어도 미쳐지지는 않던 순간들이 있었다.

미치고 싶어, 미치겠어, 도무지 미쳐지지 않는 자만이 주문할 수 있는 모순임을 비로소 알았다.

그녀도 한때는 누구의 사랑스런 딸이었고 여자였고 아내나 엄마였을 행복도 가령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영혼이 그리 쉽게 놓아지던가.  

살면서 구축한 온갖 인연과 빌어먹을 모럴이 견고하게 내 정신을 붙들었다.

질긴 신경줄과 튼튼한 두뇌는 눈치 없이 아침마다 내 육신을 깨웠다.

스스로 만든 인생이 덫이 되어 영혼의 해방을 방해하였다.

싫었다.

그쯤에서 비겁하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다그쳤던 인생과 작별을 한 지금이 불행하다고 누구도 단정지을 수 없다.

행.불행은 오롯한 그녀의 것이지 우리의 잣대가 아니니까.

다만 나의 눈물은 그녀의 혹독했을 과거에 대한 위로였음을.  

 

유리창의 안과 밖.

그녀는 우리를 구경하고 우리는 그녀를 구경한다.

속한 곳이 다를 뿐이다.

더러운 푸른 꽃무늬 블라우스와 검은 바지를 입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긴 머리를 추스리지도 않는 그녀여.
이제 행복하자. 

 

'숨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핑계  (0) 2008.08.25
한 盞짜리 문학  (0) 2008.01.12
조우  (0) 2007.08.17
추억  (0) 2007.05.29
3월도 갔다.  (0) 2007.03.3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