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케치

옥수수 스프는 내가 먹었다.

by 愛야 2007. 12. 7.

 

아침 일찍 인스턴트 옥수수 스프를 묽게 끓인다. 먹기 좋게 식혀 보온병에 담는다. 가는 길에 생수도 한 병 산다. 대학병원 소화기 내과 접수 창구에 진료 예약증을 디밀고 돌아서니먼저 와 앉아 있던 아부지가 나를 부른다.

 

야아야. 

어, 아부지. 언제 오셨어요.

9시 15분쯤 도착했다.

아침 금식해서 아부지 힘 없지요?

아니다, 니도 일찍 집 나서느라 힘들었제. 

 

위내시경을 예약한 날 오전 9시 40분. 아부지와 나는 병원 대기실 의자에서 만난다. 한 끼 굶은 아부지는 얼굴이 홀쭉하다. 살살 걸으시는 모양이 큰 환자 같다. 고작 胃 정기 검진이면서, 엄살 백단, 뻥쟁이 아부지다. 배 고픈 거 못 견디시던 호들갑은 엄마 손에 밥 드실 때의 어리광이었다. 그때가 봄날이었음을 아부지는 이제 아실까... 

 

차례가 되어 들어가시더니 수면도 아닌 일반 내시경을 하고 기진맥진 나오신다. 용감하고도 겁 많은 아부지. 수면 후 안 깨어날까 봐 일반내시경 하신단다. 

 

위궤양이 좀 있어 조직검사를 해 두었구요, 위도 얼굴처럼 노화되면 쭈글쭈글해집니다. 기능이 떨어지지요. 두 시간 지나서 마취 풀리고 흰죽을 드세요. 빠르게 설명하는 젊은 의사의 설명을 얼른 잡아채신다.

조직검사요? 암 같습니까?

암 아닙니다, 하하, 궤양도 조직검사합니다.

 

궤양이라, 없던 복병이다. 병원은 미로 같았다. 좁고 복잡하고 사람은 많다. 1층 로비의 스낵바에서 원두커피의 냄새가 짙게 피어난다. 그리하여 병원 특유의냄새가 실종된다. 행복한 코를 안고 나는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다. 삼백 원. 

아부지는, 한때는 펄펄 날아다녔던 아부지는여기 앉아 계세요 하는 대로 수굿 앉아 기다린다. 마치 길 잃을까 가만히 기다리는 아이처럼 자식이 수납과 예약과 처방전을 뽑는 것을 지켜본다. 

 

아부지 이제 30분 지났는데 물이라도 좀 드리까?

응.

두 시간 지나고 죽 드시라니, 부질 없어진 옥수수 스프도 내 가방 속에 있단 말은 안 했다.  

 

 

 

'스케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복  (0) 2008.02.11
눈과 같이  (0) 2007.12.15
머니머니 해도  (0) 2007.11.05
잃은 것과 얻은 것  (0) 2007.10.15
습관이란  (0) 2007.10.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