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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한복

by 愛야 2008. 2. 11.

백설표 식용유 냄새와 함께 설이 지나갔다. 집집마다에서 선물세트 포장지와 재활용품과 스티로폼과 음식물 쓰레기들이 밀려 나왔다. 명절이 쓰레기로 증명된다. 아니다, 명절은 돈으로 증명되나?

 

명절 특유의 들뜨고 신나는 기류가 골목에서 사라진 지는 오래이다. 아이들 옷이나 신발, 즉 설빔은 굳이 명절을 기다리지 않는다. 약간 큰 듯한, 풀기 안 죽은 어색한 새옷을 입고 조심스레 놀던 아이들은 이제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풍족한 경제가 그리 만들었다. 거리에선 더 이상 한복 입은 아이들도 볼 수 없었다. 물론 어른도.

 

어렸을 때는 아이들이 그야말로 때때옷을 곧잘 입곤 했었다. 어린 나는 정말 한복이 입고 싶었다. 엄마는 바느질 솜씨가 좋으셔서 원피스나 모직 점퍼스커트를 멋지게 지어 입히셨지만 어쩐 일인지 한복은 안 해 주셨다. 평상복이 못되는 옷을 사 주실 형편은 더우기 아니었다.

 

집과 학교 사이엔 큰 시장이 있었는데 한복가게들이 죽 늘어선 골목을 지나 초등학교를 다녔다. 한복골목이 아닌 지름길도 여럿 있었지만 나는 그 골목을 통과하길 좋아했다. 한복가게마다 벽면에 가득 걸려있는 한복을 구경하느라 천천히 걸음을 아껴 걸어갔다.

 

어린이 한복은 너무도 앙증맞고 인형옷 같았다. 소매가 색동으로 된 것, 토끼털 조끼를 입힌 것, 금박이 호르르 박힌 것, 어찌 그리 다 이뻤던지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나 저걸 입어 보나 나에겐 그저 꿈 같은 일이었다. 

 

가끔 엄마 따라 엄마의 단골 한복가게에 갈 적엔 혹시 하는 간절함에 애절한 표정도 지어 보았다. 그 한복집 아주머니는 오랜 단골인 엄마와 거의 친구처럼 다정히 지내는 분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나의 한복을 한 번도 사주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막내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분명, 쑥쑥 자라는 아이들 한복 일 년에 둬 번 입으려고, 동생도 없는데 뭐하러 사? 이랬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순식간에 나는 어린 계집아이가 되어 원망이 무럭무럭 솟구친다. 싸구려 기성 한복 한 벌 사 주었다면 어린 한 시절이 환했을 텐데....

 

아이들 한복은 입는 시기가 어느 정도 한계가 있어서 나는 학년이 높아지며 관심을 거둬들였다. 예나 지금이나 뭘 조르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발버둥치며 땅바닥을 굴러보지도 않고 쉽게 한복을 흘러보냈다. 하지만 얼마나 엄마가 막내의 꿈을 무시했는지 간간히 콕콕 각인시키곤 했다.

 

내가 드디어 나의 한복을 입은 것은 대학 졸업식 때였다. 그 시절엔 여학생들이 다 한복 위에 학사가운을 입었다. 촌스럽고 거추장스러웠지만 덕분에 나는 난생 처음 한복을 맞추었다. 노란 본견에 남색 옷고름과 끝동을 댄 삼회장 한복이었다.

 

먼저 한복을 맞추어 주겠노라 한 사람은 엄마였다. 맹세코 나는 한 번 입는 행사인데 빌려 입으려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군침을 꿀떡거리던 막내에게 한복 한 벌 안 사준 사실이 가슴에 걸리셨단다. 아니면 그 시절보다 형편이 조금 나아지셨을 것이다. 더더군다나 막내가 이젠 더 자라지 않을 어른이 되었으니 두고두고 명절에 입을 효용가치가 있기에 해 준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그 한복을 졸업식날 딱 한 번 입었다. 내 첫 한복은 엄마의 장롱 속에서 잠자다 가끔 끌려나와 이질녀의 중.고등학교 예절실습용으로 쓰이곤 했다.

 

그 다음 한복은 물론 녹의홍상이었다. 하지만 녹의홍상은 일상적으론 입지 못할 옷이다. 여분의 한복을 더 하라는 말에도 나는 싫어라 했다. 가까운 친척의 결혼식에도 늘 양장을 하였다. 색감이 은은한 갑사 한복이 탐나지 않은 건 아닌데 입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멋지지만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입어내지 못할 것 같은 겸손한 마음. 혹은 비싼 한복을 또 잠만 재울 것 같은 마음.

 

나에게 한복은, 너무 입고 싶었던 그 시절 그때라야 했다. 원색적인 색동이 있고 금박이 치마 아랫단을 장식하던, 유치하고 촌스럽고 그러나 어린 계집 아이를 눈부시게 매혹시키던 시절의 그 한복 말이다. 아아, 이젠 절대로 돌아갈 수 없으니 나에게 꿈과 같은 한복은 영원히 꿈이 되었다. 어른의 눈에는 아무 쓸모없고 싸구려 같은 인형이나 장신구에 목매는 여자아이들의 심정을 나는 알 것 같았다.

 

내 일생 두 벌의 한복을 다 장록 속에만 두었지만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남아있다. 잘하면 시어머니가 될 찬스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땐 정말 은은하고 기품있는 한복을 한 벌 장만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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