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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조箱子문

by 愛야 2008. 2. 3.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에 블로거 愛야는 두어 자 글로써 箱子에게 고하노니, 인간 부녀의 생활 가운데 중요로운 것이 테레비젼이로되 세상 사람들이 너를 바보상자라 부르는 것은 도처에 흔한 바이로다. 이 상자가 한낱 작은 물건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가 남과 달라서라고 해야 하나 사실을 말하자면 설을 앞두고 먼지 풀풀한 주머니가 가장 큰 이유이니라.

 오호 통재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안방에 지닌 지 우금 10여 년이라. 어이 인정이 그렇지 아니 하리오. 슬프다. 눈물을 잠시 거두고 너의 행장과 나의 회포를 총총히 적어 영결하노라. 오호 애재라. 비록 무심한 물건이나 어찌 사랑스럽고 미혹지 아니하리오. 아깝고 불쌍하며 또한 섭섭하도다. 나의 신세 쓸쓸하여 슬하에 한 머스마 밖에 없고, 빈둥빈둥 놀고 먹을 풍족한 가산 또한 없으니 너 혼자 집을 지킨 그 공덕을 내 어찌 모르리오. 마침 퇴근 후 너에게 종종 마음을 붙여 희희낙락 하였는데 오늘날 너를 결국 영결하니, 오호 통재라, 이는 귀신이 시기하고 하늘이 미워하심이로다. 너의 색체가 경계 넘나들며 번진 지 오래임을 내 익히 알았노라. 허나 색체 번짐은 브라운관이라는 요망한 물건의 수명이 다하여 그러한 일, 어찌 너를 탓하리오. 너의 내장 당장 고쳐주고 싶었으나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리비용이라 계산속에 솔깃하여 병든 너의 화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느니라. 오호 통재라, 자식이 귀하나 손에서 놓일 때도 있고, 비복이 순하나 명을 거스릴 때 있나니, 너의 미묘한 재질이 나의 리모컨에 수응함을 생각하면, 자식에게 지나고 비복에게 지나는지라. 비록 컴퓨터라는 신문물을 접할 때 너를 혼자 떠들도록 방치한 적 부지기수요, 정신 차리게 한다는 미명 아래 너의 대가리를 탕탕 친 적 헤아릴 수 없으나 내가 너를 미워 그랬겠느냐. 오래오래 함께 하기를 바란 까닭이었느니라. 매일 밤 너를 자장가로 삼았기로 네가 대목을 앞두고 방정이 극에 달해 스스로 잠들어 버리다니 오호 진실로 야속하도다. 어느날 너의 붉은 색이 옆동네로 한없이 번지더구나.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 노란 색, 급기야 고귀한 흰색마저 마구 뒤섞였지 않았느냐. 통제되지 않는 색체, 이웃을 내집처럼 침법하는 색체는 더 이상 형태를 가둘 수 없더구나. 흐리고 뭉개진 너의 화면을 용서한 이유는, 그려 갈 때까지 가 봐라는 나의 자포자기성 배포 탓이었음을 이제야 고백하노라.  운명의 어제 아침 진시(辰時)에, 나의 자식이 리모컨으로 너를 불러 내질 않았느냐. 오호호! 보랏빛이여! 죽음의 색체는 결국 보랏빛으로 오더구나! 오색으로 번지다 못해 보랏빛으로 통일을 이루더구나! 그리곤 영영 안녕이구나. 다급한 리모콘의 경련에도 응답이 없으니, 오호 통재라! 모든 卒은 보랏빛이여라... 무죄한 너를 마치니, 백인이 유아이사라, 누를 한하며 누를 원하리요.  너 없이 주말을 지내보니 집안이 이렇듯 적막하누나. 집안의 소리라곤 오로지 냉장고와 컴퓨러 소리, 기계음에 어찌 너만큼 정이 가겠느냐. 나의 자식이 왜 보지도 않을 너를 켜 두는지, 내가 왜 상자 속 작은 인간들의 소근거림을 들으며 잠이 들었는지 사무치게 이해되는구나. 눈 아른거려 책 밀치고 멀뚱멀뚱 앉아 있기 수 시간, 이제사 세상 사람들이 너를 "idiot box"(바보상자)라 부르는지 씁쓸히, 정말 씁쓸히 통감하는도다, 오호 애재라 테레비젼이여.    

 

 

저 유명한 유씨(兪氏)부인의 <조침문> 패러디입니다. 다 아시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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