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저 남자가 내 앞에 걸어간다. 마른 몸에 꼬질한 티셔츠 차림이다.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이지만 40대, 혹은 50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아파트 7,8호 라인 출입구에서 그는 언제나 구부정하게 걸어 나온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는 동네를 배회한다. 처음엔 그가 동네걷기 운동하는 줄 알았다.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은 땅을 향해 있다. 물론 낮에만 땅을 본다. 땅을 보며 걷는다고 모두 철학자는 아니다. 그는 다만 땅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찾을 뿐이다. 텅빈 주머니가 그를 길바닥 탐색으로 내몬다.
길에서 담배를 피다가 휙 버려 주는 고마운 끽연가가 점점 사라지는 요즘, 좀처럼 피울 만한 長초를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괜찮은 물건을 발견하고 소중히 털어 주머니에 간직하는 그를 목격하곤 한다.
어느 날은 밤에도 그를 본다. 밤에는 길바닥이 어둡다. 그래서 아예 대놓고 담배 구걸을 한다. 마주 오는 젊은이에게 담배 한 대를 비굴히 청한다. 그들은 주로 안 피운다고 답하고 비껴간다. 저 아저씨 또 나왔네 생각할지도 모른다. 같은 동네에서 그에게 담배를 적선해 본 경험자들일 확률이 크다. 처음 한 번이지 비싼 담배 번번이 한 가치만 달라는 그는 염치없다. 공급이 순조롭지 않으면 그의 활동 범위가 넓어진다. 점점 먼 곳에서 그를 본다.
더러는 비 오는 날에도 우산 쓴 그를 본다. 비 오면 꽁초를 어찌 줍나. 비 온다고 담배가 안 피우고 싶진 않아 나왔을 것이다. 이건 오지랖 넓은 걱정이 아니다. 내가 어디 그리 인정스런 성품인가. 나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가 괘씸하고 경멸스럽다.
사서 피울 처지가 못되면 혀 깨물고서라도 끊어야 한다. 구걸하지 않으면 굶어 죽어야 하는 끼니의 문제도 아니고 담배다. 자신을 팽개치면서까지 피워야 한다면 경멸당해도 불쌍하지 않다. 더구나 노인도 아닌 젊은 남자가 아닌가. 돈을 벌어 자신의 담뱃값을 충당해도 좋을 나이에 그는 담배를 가진 다른 젊은이에게 손을 내민다. 끊지도 벌지도 않고 그렇게 세월을 흘린다.
그에게 처자식이 있는지, 부모와 기거하는지 모른다. 어느쪽이든 혀가 끌끌이다. 가족도 그가 하루에 수없이 꽁초사냥을 다니고 담배구걸을 하다 툇짜를 맞는지 알 것이다. 그의 표정엔 나, 눈치밥이라고 쓰여있다.
살아가는 행위란 참으로 누추하다. 먹고 싸고 입고, 그것을 위해 다투고 울고 죽이고 속이고 인간임을 포기하고 구걸한다. 목숨을 연장하는 하루하루가 신께 구걸하는 행위다. 하지만 그것이 다라면 누구도 세상에 남지 않을 것이다.
삶의 갈피에서 살째기 피어오르는 제각각의 존엄함이나 깨달음이나 귀함이 나라는 존재를 이어가게 한다. 그에게서 그것의 부재를 본다. 그래서 뒤통수를 한 대 퍽 갈겨버리고 싶다. 다만 실천은.... 음, 미루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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