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 든다. 요즘의 내 시력은 복합적인 과도기에 있어 활자를 읽기 고단하다. 평소 쓰는 안경을 끼면 가까운 글자가 안 보인다. 안경 벗은 맨눈으로 팔을 쭉 뻗어 책을 최대한 멀찍이 보낸다. 난시가 심한 왼쪽 눈이 장막 한꺼풀 씌운 듯 명쾌하지 못하다. 그런대로 눈에 힘주어 집중하며 소설을 읽는다.
"석 달 조금 못 되게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그는 곤충들이 부럽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라고 소설은 시작되고 있다.
다리 열 개를 잃고도 다리가 없어진 사실을 모른 채 열심히 도망가는 지네라든지 머리를 먹히면서도 교미 중인 수컷 사마귀라든지. 그것들에겐 통증이, 고통이 없기 때문이라는 '나'의 말이 사실이라면 통증이 없다는 섭리는 얼마나 코미디인가. 곤충 뿐이랴, 통증이 없는 미물은 죽어도 행복할 수 밖에 없겠다.
어느새 책은 또 배 위에 얹혀 있고 내 눈은 창문을 멍하니 향하고 있다. 창문을 보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창밖이 보이지도 않는다. 고작 두 페이지도 집중해서 나가지 못하고 머리속은 이미 헝크러졌다. 다시 책을 펴 든다. 활자와 작가와 의미에만 몰입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또 내 배 위에 엎어진 책을 발견한다. 창문을 마주하고 책을 읽는 게 아니었다. 문장이 끊어지는 지점에서 상념이 시작된다. 오후 내내 단편 하나의 진전도 없다.
가장 낮은 돋보기를 사야겠다. 며칠 전 깡통시장에서 본 앙징맞고 섹시한 돋보기. 돋보기가 필요한 육신에 굴복할 때가 되었다. 활자가 머뭇거림 없이 죽죽 눈에 들어와 박히면 책에서 마음을 들어올리는 일도 없을 테지. 그러면 마음의 통증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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