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면 꼭 사는 책이 몇 권 있다.
연도별로 출판되는 작품집들이 그것인데 올해 이상 문학상 작품집은 표지가 모던하게 바뀌었다.
수상 작품을 읽은 후, 아껴가며 야금야금 보리라 하고 머리맡에 고이 모셔둔 것이 수개월 전이다.
지나치게 아꼈다.
책을 집어들었다.
오늘따라 특별히 독서 욕구가 치솟은 게 아니라 특별히 따분하였기 때문이다.
표지를 넘기자 속지 첫 페이지에서 낙서 같은 메모가 나타났다.
책을 사면 날짜와 간단한 인상, 장소를 적는 습관대로였지만, 나는 전혀 처음 보는 듯했다.
마치 타인의 일기를 훔친 듯 가슴마저 쿵 했다.
_ 횡단보도를 건너가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길 건너편 화장품 가게로 들어가리라, 미샤.
나는 좀 연한 립스틱과 제일 어두운 컬러의 파운데이션을 살 예정이었다.
아직은 봄이 오지 않았다.
춥고 바람이 불었다.
빠리바게뜨 앞 횡단보도 신호등은 유난히 길고, 나의 등 뒤는 <동아서적>이다.
새해가 된 지 벌써 두 달.
해마다 사는 몇 권의 책마저 미적대고 있다.
신호가 바뀌었다.
하지만 <동아서적>이 더 가까운 거리.
'12. 2. 24. 오후
글씨는 늘 단정치 못하다.
그래, 기억이 났다.
저 날 신호등이 바뀌었음에도 건너가지 않고 등 뒤 <동아서적>으로 들어가 이 책을 샀었다는 말이다.
나는 암호 해독하였다.
그 후 연한 립스틱은 선물을 받아 생겼으나 제일 어두운 컬러의 파운데이션은 아직이다.
나는 왜 연한 립스틱과 어두운 컬러의 파운데이션을 사려고 했을까.
둘 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음을 수십 년째 알고 있는데.
그냥 그러고 싶었다.
분명 겨울 오후의 쓸쓸한 햇빛이 범인일 것이다.
나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행복을 바라보듯 메모를 읽었다.
낯설게 읽었다.
내가 내 메모를 읽는 순간, 짧은 두근거림이 있었다.
나는 완전히 타인으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이것, 괜찮다.
모든 기억이 굳이 생생할 필요는 없구나.
즐거운 의외성이란 망각에서 출발하도다.
특히 글, 이를테면 일기나 블록 글이나 심지어 가계부조차, 잊혔던 기록의 재등장은 얼마나 놀랍고 재미지던가.
그 기록 속의 나는 3인칭 <그녀>일 뿐이다.
훔쳐보기가 가능해진 대상.
언젠가 내가 나를 깡그리 잊는다 해도 그것 또한 괜찮다.
한 자락 섬광처럼 어느날 들추어질 때 나는 비로소 나를 타인으로 읽을 것이다.
그때 다시 만나지는 <그녀>가 부디 싱긋 웃고 있기를, 아아 제발 그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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