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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무서운 숙제.

by 愛야 2005. 9. 16.

계절이 바뀌는 순간에는 꼭 비가 있다.

여름에서 가을로, 다시 겨울로 들어서는 들머리에 비가 한차례 지나간다.

비가 갠 아침에 갑자기 하늘이 쑥 높아져 있기도 하고, 몸을 옹송거리게 만드는 찬바람이 찾아들기도 한다.

올해도 가을과 겨울밖에 남지 않았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한숨이 난다. 

올 해 안으로 꼭 이루어야 하는 숙제가 있어서다.

 

운.전.면.허.이다.

나는 도무지 이 숙제를 해결할 자신이 없다.

무언가 해결해야 될 일이 생기면 나는 머리 속으로 끊임없이 예행연습을 해 본다.

이리 하고 저리 하면 딱 되겠다...

생각을 점점 몰아가다 보면 답도 얻어지고 방법도 궁리된다.

헌데 이 운전이라는 문제에 봉착하면 무조건, 옴마야, 나는 못해 함시로 손사래부터 친다는 것이다.

전혀 마인드 맵을 그릴 수 없었다.

친정언니가 어느날 나에게 말했다.

 

이제 차를 바꾸어야겠는데, 너 빨리 면허따서 내 차를 가져가라.

차는 작아도 사고  한 번 안 난 깨끗한 내부라서 정비사들도 탐낸다.

올해 안에 꼭 차 바꾸게 해 다오.

 

이게 재작년 대사인데, 언니는 올해 드디어 승질을 낸다.

 

올해 안에 안 가져 가면 아무나 줘 버린다.

너는 기름만 넣어 타라는데 대체 왜 면허를 안 따는데?

더구나 운전학원도 세금도 니 돈 안 들게 해준다자나!

맨날 걷느라 피곤해 하면서.

 

면허를 왜 안 따냐면 운전을 하기 싫어서다.

이유를 말하자면 너무 유치하지만 나한테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다.

면허 따면 운전할 것이고, 운전하다 보면 사고도 날 것이고, 경미한 사고만 나라는 보장도 없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ㅡ죽을까봐 무서워서다.

 

내가 사고나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15살 내 아들이 엄마의 사고를 혼자 전해듣는 순간을...

안된다.

절대 그럴 순 없다.

아직 어린 아이의 그 황망함과 공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아프다.

 

15살의 머스마는 어린이에서 간신히 벗어난 설익은 인간일 뿐인데, 어찌 벌써 엄마를 잃을 것인가.

주변의 이모 고모 할배 큰아빠들이 키워야 주겠지만 15살 아들의 채워지지 않을 헛헛함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죽지 않고 부상만 당한다 해도 아들은 나를 감당할 나이가 아직 아니다.

이유는 그것 뿐이다.

얼빵한 내가 운전하는 것보다는 전문 기사가 운전하는 큰 차, 즉 대중교통이 사고로 죽을 확률을 훨씬 줄여 준다. 

더구나 나처럼 망상이 많아서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머릿속으로 소설을 몇 편씩 쓰는 사람에겐 운전이란 참으로 무모한 시도인 것이다.

 

언니야, 아아 20살쯤 되서 하믄 안되것나. 이 객지에서 사고라도 나면 아아는 우짜라고,

변명해 보았지만 언니는 어이없어 하며 매몰차다.

그라모 나는 우찌 했겠노 ! 

 

그건 맞다. 형부를 교통사고로 보낸 지 20여 년이다.

언니는 용감무쌍하게 운전까지 배워가며 혼자 두 조카들을 잘 키워냈다. 

치과의사와 대기업 대리가 된 조카들이다.

아빠를 여읜 두 새끼를 보듬고도 언니는 필요하다면 운전도 서슴지 않았는데 나는 너무 소심한가? 

 

차도 공짜요 운전학원 등록도 공짜인데도 너무 욕심이 없나?

진취성 결여의 인간이긴 하지만, 너무 오래 주저앉아 있나?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두려워하느라 벌벌 떨고 있나? 

모르겠다.

운전하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인가?

나처럼 겁 많은 인간이 아니겠지.

또는 불편함을 못 견디든지 .

또는 든든한 남편이 있어서 아이가 모든 사고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든가...

 

이렇게 이유를 대며 몇 년을 버텼는데 이젠 목이 꽉 차서 더 도망칠 자리가 없다.

요즘은 아들에게 운전하는 엄마가 필요하게 되었다.

학원에서 밤 늦게 올 때가 많고 머잖아 고등학교엘 가면 여러모로 엄마의 기동성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내가 운전의 필요를 느끼는 순간이란, 비가 쏟아질 때나 짐 많을 때, 가 보고 싶은 곳을 교통의 불편으로 못 갈 때등, 아주 가끔이다. 

그러나 운전의 불편함을 대라면 48가지도 댈 수 있다.

그중 으뜸은, 음주로 우의를 다지는 인간관계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토록 열심히 빠져나갈  핑게거리를 갖다 댄다는 것은 무어냐, 결국 종착점에 다라라 항복을 코 앞에 두고 있다는 결론이다.

어쩔 수 없는 대세에 밀려, 운전면허 2005년 최신판을 머리맡에 둔 지도 2주일이 넘었지만 첫 표지도 넘겨지지 않는다.

아직도 엄두가 나지 않는 걸 어쩌나.

아들이 밤 사이 20살로 자라 있기를 바랄 뿐이다.

숙제다, 것도 아주 무서운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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