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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숨어있는 검버섯

by 愛야 2005. 11. 14.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과 생각을 닮아가는 것.

서글픈 생각이 친정을 다녀오는 내내 머릿속을 맴돈다.

 

엄마의 방으로 들어서니 누워 있다가 일어나 앉으셨다.

구부정한 등에 얼굴 가득 주름지어 웃으신다.

왔냐, 배고프겠다.

날씨가 쌀쌀한 탓인가, 유난히 검버섯이 크게 두드러져 보인다.

검버섯은 얼굴과 손등을 점령한 지 오래다.

배 안 고파, 하고 나니 할 말이 없다. 

 

손으로 검버섯을 가만히 만져 본다. 

다른 피부보다 뻣뻣이 느껴진다. 

크고 작게, 혹은 진하고 엷게 엄마의 세월을 증명해 보이는 그것은 마치 생채기 위에 앉은 얇은 딱지 같아 보인다.

고단하지 않은 한평생이 어디 있을까, 엄마는 그만하면 평탄하게 살아오신 편인데, 무슨 상처가 많으셔서, 하다가 생각을 멈추었다.

지난 10년 동안에 다 생긴 검버섯이지 하는 깨우침이 나를 멈추게 하였다.

 

10년 전 초여름 어느 날, 나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서울로 수술하러 간다, 가기 전에 새끼 데리고 한번 오너라. 머릿속에 혹이 생겼단다. 암 아니니 걱정 말어. 울기는 왜 우냐."

젊은 시절부터 두통을 달고 사셨던 엄마라 온 가족들은 망연자실했었다.

최근의 달라진 두통 증세를 엄마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고 가족들도 습관처럼 지나쳤었다.

 

두 번의 지옥 같은 머리 수술 후, 부축 없이는 거동을 못 하시는 지난 10년이 엄마에겐 죽음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죽지도 낫지도 않는구나, 저기 저 사람들처럼 나도 양산 쓰고 두 발로 후딱후딱 걸어가고 싶다."

 

고왔던 엄마였다.

처녀 시절엔 동네 총각들 속깨나 태웠을 거라고 이모는 말했다.

수야, 니 엄마 어릴 때 이름이다, 수야가 중참을 이고 들에 가면 일하던 총각들이 다 한 번씩은 돌아 보았니라. 흐흐, 병약해서 탈이지 좀 이뻤나? 니 엄마 쌍꺼풀진 큰 눈을 요새야 좋다 하지만 그 옛날에는 안 좋다 했니라.

 

엄마는 병약하여 농사꾼의 아내가 못 되고 성질 고약한 젊은 선생의 아내가 되었다.

19살, 아아 19살이라니, 한 가난한 선생의 아내가 되어 그의 강파른 성질을 다 받아내기에는 눈부신 나이이다.

아버지도 어리디 어린 20살이지만 나는 엄마의 19살만 더 애절하였다 .

 

그렇게 만난 어린 부부는 혼인 56년을 넘기는 중이었다. 

낭만과 문학적인 모습으로 찍은 아버지의 흑백사진에는 엄마는 없고 젊은 아버지만 동그란 안경을 쓰고 웃고 계셨다.

아버지는 엄마의 미모를 혼자 사랑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 속의 젊은 엄마는 항상 머리를 틀어 올리고 계셨는데, 드러나는 목덜미가 고우니 늘 그러고 있으라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귀찮아서 한 번 자르고 파마했다가 집에서 쫓겨날 뻔했지."

지금도 그러하지만, 아버지는 엄마를 사랑한다고, 평생 니 엄마를 짝사랑한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아버지 식대로 사랑하실 뿐이었다.

"그래도 너거 아부지 같이 불쌍한 양반도 없지 싶다. 입으로만 승질 부리지. 혼자 그 많은 식구 치다꺼리에 한평생이 다 갔다..."

이제야 엄마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신 것일까.

 

"엄마, 아버지 바람은 안 피웠어요?"

옛날 뜨개질하는 엄마 곁에서 뒹굴거리다가 지나가듯 물었다.

"응 바람? 왜 안 피웠으까. 어느 날은 내가 뒤를 밟아 보았지. 근데 내가 따라가는 줄을 아버지가 아셨는 거라, 어디선가 내가 아버지를 놓쳐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니 아버지가 먼저 와서 대문을 닫아걸고는 절대 열어 주지 마라 하셨는 거라. 아이구 그때 식겁했다. 그래서? 뭐 그래서? 누군가가 열어 주어서 들어 왔지. 너거 아부지 그 독한 성질하고 말을 어찌 다...어느 날 다리 위를 지나가는데 저 아래로 뛰어내리면 죽어질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그때 니가 내 뱃속에 있었다..."

 

엄마도 아버지도 거쳐온 아름다웠던 사랑이 있었으리라.

한때의 미풍처럼 나를 흔들고 지나가 버리고 뒤돌아보면 아픈 회한으로 남는 것. 

한평생 지나온 사랑이 자잘한 상처로 남아, 나를 기억해 달라 딱지 같은 검버섯으로 돋아 오르는 것일까.

 

"야아야, 내 속옷을 갈아입어야 되겠는데..."

기침 후 엄마는 조심스레 말한다. 자식에게도 염치 바른 할머니이다.

"응, 엄마 기침하셨구나, 아이고 딱 한 방울 묻었네, 그래도 위생상 속옷은 갈아입읍시다. 젊은 것들도 기침하면 다 찔끔거려, 하하."

무안을 덜어주려는 딸의 너스레는 서툴렀다. 

엄마는 말이 없었다.

엄마는 부끄러운 여윈 다리를 움츠렸다.

내 눈에서 눈물이 솟구쳐 방바닥만 내려다본다.

엄마는 지금도 상처받는 중일까. 

엄마가 간절히 걷고 싶어하는 집앞 길을 나는 투덜대며 걸어왔다. 

단풍 나들이 떠나시는 아버지의 설렘도 엄마에겐 비밀로 숨기고 싶었다.

죄스러웠다.

 

돌아오는 밤 버스의 유리창은 거울이 되어 나의 얼굴을 비쳐 준다.

엄마를 가장 많이 닮았고 또 닮아 가는 중이다.

엄마의 30대, 엄마의 40대를 차례차례 밟아가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의 50대, 60대를 미리 봐 버리곤 한다.

검버섯이 돋아 올라 있는 나의 얼굴.

지금은 다만 숨어 있을 뿐, 엄마보다 더 진하고 커다란 딱지가 돋아날 게 분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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