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있다.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고단한 잠에 빠졌던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했다면, 온 세상은 충분히 봄비로 흠뻑 젖어 있으리라.
기상캐스터의 예보가 아니라 해도, 나는 어제 오늘의 비를 알았다. 내 심장이 그렇게 예고를 보내 왔다. 심장은 참으로 이상하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쿵 내려앉아, 주체 못 할 마음을 복병처럼 보낸다.
쓸쓸하였다. 진종일 쓸쓸하였다.
갈비뼈 깊숙한 저 아래 어딘가엔 분명코 커다란 물주머니가 있다. 그것이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고 일렁이기 시작하면 나는 종일, 울고 싶은 마음을 숨기느라 마음에 불을 지펴야 한다. 내일 할 일도 오늘로 당겨 미리 했고, 사지 않아도 될 옷을 보기 위해 시간을 썼고, 동네 꼬마에게 월드콘 아이스크림을 사조고, 은목걸이를 눈부시게 할 광약을 구하러 돌아다녔다.
바람이 헝클어뜨린 머리카락 사이로 반쯤 열린 목련이 언뜻 보였으나 가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 지금은 마음이 개떡같아 너를 봐 줄 수가 없다. 그래도 여전히 쓸쓸하였다. 급기야 거리에 네온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저녁 어스름이 지려했다. 불길했다. 바람도 옷자락을 여미게 춥다.
그랬다. 나는 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이러한 날 따뜻한 사람들과의 한 잔의 술, 그것이 일렁이는 심장을 가라앉혀 주리라는 것도 말이다. 또한 분명하다. 한 잔의 술은 기필코 물주머니를 터뜨려 단 한 방울의 슬픔마저 모두 쏟아지게 하리라는 것도. 비움으로써 진정되는 고단한 카타르시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의 어금니 신경은 이런 봄날에 반기를 드는 것일까. 참을성이 부족한 나를 단련시키려 함인가. 고작 치아 따위로 확인받는 살아온 세월이 서글프다.
하늘이 점점 가라앉고 있던 퇴근길에서 나는 느릿느릿 심장을 어루만졌다. 내일은 비가 오겠다. 너 하루종일 그래서 날뛰었더냐. 조금만 기둘려라, 니가 울지 않아도 내일은 세상이 충분히 촉촉할 거야.
늦은 밤 아들에게 말했다.
엄마는 이 담에 뭐로 태어나고 싶어? 라고 물어 봐 줘.
아들은 또야? 하는 얼굴이었지만 체념한 듯 묻는다.
엄마는 이 담에 뭐로 태어나고 싶어?
나는 까마득히 큰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나무가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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